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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와 새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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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2-01 13:39 조회 1,04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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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어느 덧 와인 생산국이 되었답니다.

특별하긴 해도 오디와인, 산머루와인, 포도로 연간 1000억 정도를 생산한답니다.

와인의 주생산 국가는 프랑스와 미국이 인데, 프랑스의 경우 와인 소비가 급감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도 같은 경우인데, 술 권하는 문화가 줄어든 탓이고, 우리나라는 커피가 대세를 이룬 탓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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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도주와 부대

와인은 포도주입니다.

이 기원은 언제 누가 어떻게 시작되고 보급되었는지는 불확실해도,

노아도 이 포도주를 먹고 대취한 것으로 보아 원시사회 때부터 생활화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포도주를 양가죽부대에 두었거나 아님, 가난잔치 집을 보면 항아리에 두었습니다. 현대는 오크통에 보관하는 것을 볼 때, 세월에 비해 큰 발전은 없는 듯합니다.

다만, 가죽부대의 옛 포도주는 혹 동물 비린내가 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여하한 가죽부대의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부대가 낡아짐에 있습니다.

낡아짐은 신축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가 아닌 새 부대에 보관하는 일이 관습이고 지혜였습니다.

그렇다면 새 부대는 어떨까요? 신축성이 있고 질겼지요.

 

뭐든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피부는 회복이 빠릅니다만 늙은 피부는 쳐지고 늙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로서 제사장 나라 유대교와 하나님 나라 기독교를 설명하셨습니다.

 

2)유대교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아시기 바랍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통치했습니다.

이 율법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신앙부분과 생활부분 전체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제사도 법대로 드려야하고, 그 제사 드리는 제사장도 법대로 세워야 하고 결혼도 법대로 해야 했습니다.

이 법은 완전하여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법에 의한 마지막 선지자는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 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16:16)

이 율법은 무서워도 사람들에게 구원자를 생각하게 했고, 이 세례요한은 주님을 목소리로 증거했습니다.

율법이나 세례요한은 한시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타내는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좋아도 구원의 능력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에는 신축성이라는 융통성, 즉 자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주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국한되었습니다.

지역으로 말하면 유대 땅, 민족으로는 유대민족, 시간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입니다.

유대교의 한계입니다.

본문 아랫 장을 보면 안식일의 두 사건이 나옵니다.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요? 그야말로 안식의 날입니다. 3보 이상 움직이면 않되고 소가 웅덩이에 빠져도 건지면 않되는 법정일입니다.

그런데 주의 제자들이 밀밭에서 밀 이삭을 비벼먹었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는 예수님이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유대교의 열심당원들이 볼 때에 큰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 유대교입니다.

 

2) 기독교

이제 한 아이가 태어났고 한 나라가 시작되었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시작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율법이 통치하지 않고 주의 보내신 성령이 통치하십니다.

새 포도주인 셈입니다.

여기는, 유대민족을 초월합니다. 열방을 품습니다. 전 국가를 통치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이 기독교의 특징은 평강과 자유입니다.

성령이 계시니 희락이 넘칩니다.

죄를 정죄 받은 일이 아니라 죄사함 받았으니, 죄책이 사라져 자유가 넘칩니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법으로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했는데 이제는 언제나 다락방에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제사는 대제사상이 예복을 입고 대신 드렸는데 이제는 내가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습니다.

옛날에는 유대민족과 이방민족의 구별이 확실했는데, 이제는 이방민족도 차별이 없습니다.

법에 의한 신앙이나 생활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감동으로, 행동하면 그만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아래 성경구절이 웅변합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7:33~34)

 

주님의 모습을 보면 개혁적이었습니다.

고루한 유대교에 익숙했던 당대의 사람들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앉은뱅이와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등의 기사가 마구생기니 그 폭발력은 대단했습니다.

군중은 이 기독교로 몰렸고 유대교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새 포도주와 새 부대가 제자들을 통해서 유대 전역에 확산되고 사도바울을 통해서 견고히 되어 황제국인 로마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3)이해관계

이삭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털 많고 사냥을 좋아한 에서와 매끈매끈하고 조용한 야곱,

둘은 어떤 관계인가요? 형제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이 둘의 사실관계는 예증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 바탕을 둡니다. 뿌리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함께 대합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꽃은 기독교입니다. 그 메시야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를 애써 부정하면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5:39)” 있습니다.

이들이 이 탓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사도바울의 선교도 훼방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성경을 억지로 풀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으로 푸니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교는 있습니다. 여전히 그 모습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때에 저들은 초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인 기독교의문제는 무엇인가요?

첫째는, 유대교로 되돌아 가고자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주님이 대속하셨는데 억지로 옛 율법주의로 되돌아가고자하는 모습은,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설교단을 제단처럼 꾸미고 목사가 제사장처럼 보일려고 합니다.

각종 구약의 절기를 지키고자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 눅5:38)”

 

둘째는, 자유의 남용이거나 오용입니다.

자유를 죄짓는 일에 쓴다면 어떨까요?

감옥에서 나오도록 했더니 망나니로 산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자유는 망하는 자유가 아니라 주를 높이고 뭇 영혼을 구원하는 자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무엇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중해야 합니다. 내 자유가 남에게 거치는 일이 된다면 어떨까요?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자유조차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고 덕 있게 사용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문화는 청교도적입니다.

자유하되 순결과 성결에 맞추어져 있어 경건하여 단정하게 만듭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그릇의 겉만 깨끗하게 할뿐, 속은 깨끗이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겉과 속을 깨끗이 합니다.

 

또한 자유와 방종은 다릅니다.

방종은 방탕합니다.

성령 충만함과 술 취함의 차이입니다.

비슷한 것 같아도 본질이 다릅니다.

성령 충만하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만 술 취하면 반대의 모습이 나옵니다.

술을 먹던 아니 먹던, 자유와 방종의 차이가 이처럼 현저합니다.

 

기독교의 자유는 율법의 의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웁니다.

그러나 조문 하나하나는 초월합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나 잔치 집에서 예수님으로 빚어진 나중 포도주가 먼저 빚어진 포도주보다 맛과 향이 나았습니다.

새 포도주인 하나님나라의 우월성을 가리킨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포도주입니다.

기독교란 새 부대에 담겼습니다. 삶의 신축성을 융통성을 발휘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를 비난하거나 정죄 마십시오.

우리에겐 용서의 능력은 있어도 정죄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반 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눅6:35)”

율법에는 용서가 없었습니다. 오직 이에는 이였습니다만,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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