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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재물과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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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3-01 13:55 조회 1,10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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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이틀 동안 판박이 사건이 났습니다.

민간인 엽총난사 사건은 몇 가지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총기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과,

말세에는 사람들이 조급하며, 분을 참지 못하며, 돈을 사랑하며,

또한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됨과,

앞으로 이런 사건은 더욱 증가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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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요? 삶의 모양을 바꾸어야 됩니다.

 

1) 의리로써

언제나 세상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 둘 있는데, 하나는 자본력이고 둘은 도덕력입니다.

이 둘이 수레바퀴처럼 공존하면 삶은 순탄합니다만 어느 한쪽이 아니면 둘 다가 없으면 난세가 됩니다.

 

자본력은 재물입니다. 공부하고 취직하는 일등은 이 자본력을 갖추기 위함입니다.

이 자본력이 없으면 선한사업도 공상이 됩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 미국의 인터뷰여왕인 ‘바버라 월터스’가 자기 모교인 뉴욕의 사라 로렌스대학교에 165억을 기부한다고 했습니다.

학교는 이 기부금으로 캠퍼스쎈터를 짓고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불할 방침이랍니다.

 

이 자본력을 움직이는 힘에는, 도덕력이 있어야 건강하고 안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생산이 아니라 파괴가 되기 때문입니다.

 

도덕은 어디서 오나요? 바른 윤리인데 경건에서 와야 건강합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으뜸 도덕국가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해, 영국에선 불량국가 1위로 꼽혔습니다.

간통죄가 폐지되자 콘돔회사와 막걸리회사와 등산복회사의 줏가가 상승했다는 일은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법이 없어졌으니 윤리도 실종된다는 씁쓸한 자화상 때문입니다.

 

바른 윤리만 살아있다면 어떨까요? 엽총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요,

콘돔회사와 막걸리회사와 등산복회사의 줏가도 상승하지 않았을 터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잠10:2)”

 

기독신앙은 부자 되기 보단 옳게 사는 사람을 만듭니다.

경건한 영의 사람을 만들기에, 의리(바른 윤리) 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무서워 섬기는 대상이 아니고 참사랑해서 섬기는 대상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레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0:12~13)“

 

*이웃과의 관계에서, 의리는 배려입니다.

현대인의 잘못함이 몇 가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국가가 책임지라며 자기 자식 교육비와 양육비까지 내주길 바라는 일은 잘못입니다.

또한 이웃의 개념이 없습니다.

나 아닌 주변이 이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감을 알고 자기유익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도 배려해주어야 합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봄날에 공원벤츠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성도 과자를 한 봉 사들고 그 옆자리에 앉아 책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책을 보며 혼자 먹는 과자인데 과자가 빨리 줄어들었습니다. 할아버지도 먹는 거였습니다.

책을 보니 또 할아버지 손이 보이고,, 화가 난 여성은 일어나 한마디 했습니다.

왜 내 과자를 먹었어요?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고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웬일 인가요? 과자 한 봉이 또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그 할아버지 과자를 먹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물질과의 관계에서, 의리는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흔히 “돈은 좇아가면 도망가니 돈 따라 오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해는 되는데 방법을 모릅니다.

돈이 없을수록 조급하여서 돈을 좇습니다. 그러나 돈은 먼 산 보듯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이 나를 따라오게 하기 위해선 때를 기다려야하고, 내 줏가를 올려야 합니다.

 

그 방법 중에 최고는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0~21)“

 

요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보단 다 쓰고 죽겠답니다.

그래서 그러한 동호회가 생겼는데 ‘죽쓰회“랍니다.

비극입니다. 이런 발상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 불화가 생깁니다.

부모가 능력이 되면 자식의 힘이 되어야지요, 다 쓰고 죽을 일이 어디 있어요?

물질과의 관계가 원통한 관계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돈은 내가 귀히 쓰면 돈도 나를 귀히 만들어줍니다.

내가 천박히 쓰면 천박히 만들어주고요, 마치 부부관계 같습니다.

 

부인 생일에 케잌을 사오다 차에 받힌 남편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남편을 놀려먹었습니다. “절뚝발이 절뚝발이”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부인을 향해서 절뚝발이 부인이라 불렀습니다.

부인이 뉘우치고 다른동네로 이사가 “박사님 박사님”했더니 그 동네 사람들은 자기를 사모님이라 불렀습니다.

속담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 했습니다.

어디가 가장, 정승 같을까요? “주가 쓰시겠다”할 적에,,, 영광입니다.

 

3) 기적

홍해가 갈라졌음은 기적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됨도 기적이고 쓴 샘이 단물이 된 것도 기적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의 사건이 있었는데 왜 현대는 없을까요?

현대에도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라 요4:23)”

 

하나님이 찾아주시는 일 만큼의 기적이 있을까요?

사업장에, 가정에 직장에, 그리고 내게, 그 영광의 하나님이 찾아주신다면,, 내주하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또 찾아주신다면, 어떨까요? 그곳이 천국과 진배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찾았느냐 이고, 어떻게 대우했느냐 입니다.

한동안 세상의 갑 질을 말했습니다. 을에게 한 갑 질도 서럽지만 을이 같은 을에게 한 갑 질은 더 서럽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갑 질하셨나요?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그 하나님께 을 질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을 질입니다.

그러면서 기적, 혹은 복을 바란다면 바보이거나 이기적입니다.

 

성경학자 제롬(saint jerom 342~420)이 있었습니다.

원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며 주석도 썼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동굴에서 이 번역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번역 일을 하는데 사자가 한 마리 들어왔습니다.

모두가 혼비백산했지만 그는 태연히 성경번역에 몰두했습니다.

신기하게 사자는 신기하게 제롬에게 와서 앞발을 내밀었고 제롬은 거기에 박힌 가시를 보아 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자는 제롬에게 들어 누웠습니다. 제롬과 사자는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자는 더 이상의 동물의 왕이 아니라 제롬의 종이 되어 땔감을 나르는 나귀를 지키는 종이 되었습니다.

 

사자는 제롬에게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제롬 덕에 다시 산 것입니다. 은혜란 이처럼 공짜로 받은 것을 말합니다.

사자는 이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 은혜를 잃으면 배은망덕입니다. 사람들 중에 참 많습니다.

세상은 이들 때문에 사나워집니다.

이들은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때는 죽어도 그 은혜를 잃지 않겠다고 하여도 보답은커녕 원수로 새깁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식하는 신자는 위급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할 줄은 안다.

그러나 그 위험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에는 감사할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 이런 신앙에는 기적이 없습니다.

기적은 단순히 놀람, 그 이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그저 재물의 증가인가요?

의리인, 경건인가요?

재물을 찾고 재물을 사랑하는 데는 원수 되어 죽이고 죽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리는, 더 하나님을 찾는 경건은 죽음에서 건집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잠10:3)

 

결론)세상을 사는 방식은 언제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땅의 방식은 내가 물질에 붙잡혀 사는 삶입니다.

주가 주시는 방식은 좀 더딘 것 같고, 무모한 것 같아도 주와 동행하며 주를 위해 사는 일입니다.

선택은 자유이고 내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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