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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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은 밤새 집안에서 입었던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이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먼저 주와 함께 내 죄악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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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주간은 주와 함께 죽기위한 뭇 성도들의 노력이 여러 모양으로 있었습니다.
금식을 하며, 오락을 절제하며, 더러는 기도와 묵상에 힘쓰며 등,
그러나 다시 산 모습은 한결같습니다.
거룩한 다짐과 서원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1) 부활의 사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인류 역사 중에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보통 3일장을 치루는데, 그 이유가 혹 다시 살아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죽습니다.
주님 십자가위에서 죽으실 때도 무덤이 터지며 성도들이 부활했습니다만 영생에 이르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부활은 영생으로 이어졌습니다.
*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 이유는 믿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기 때문이며 우리 믿음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부활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신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요, 발명가요, 과학자인 파스칼은 부활에 관하여 명언을 남겼습니다.
“주의 부활은 사실이다. 만약 주의 제자들이 모의한 거짓이라면 누군가의, 한사람의 배반으로도 거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박해와 순교를 치루었다”
그의 진술은 과학자다운 논리였기에 좋았고, 그도 마침내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곧 영생을 취한 모습이었기에 더한층 부활을 증명했습니다.
가끔은 기획부동산이라면서 뜬금없이 전화가 옵니다. 좋은 땅 나왔으니 사라면서,
여러분은 그 말을 믿나요? 전화를 끊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처럼 좋은 것이라면 당신부터 먼저 사시오.” 한 생각이 드는 이치입니다.
부활을 참으로 믿으니 파스칼은 그 신앙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적 요소이고 자랑이고 기쁨이며 소망이 됩니다.
누가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나요? 오직 주의 무덤만이 열렸고 주의 무덤만이 비었습니다. 어느 신앙에서 부활의 감격과 소망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일체의 비결은 “죽어도 다시 살겠고” 하신 믿음이었고 담대함이었습니다.
2) 부활의 사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어떠한가요? “아멘” 할 수 있나요?
주의 십자가위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사건으로 고백되어지나요?
이 고백자에겐,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떠나서 동일한 특성이 나오는데,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성향이 나옵니다.
성향은 억지가 아닙니다. 자연스럼입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은, 위엣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땅엣 것을 생각했는데, 이젠 바뀐 것입니다. 성령님이 은혜를 주사 새사람 되게 하신 덕입니다. 이 성향을 새 본성으로 들어내야 성도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는 일은, 직분이나 신앙년수나 재산이나 학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구름 같은 것을 붙잡고 맛보려한다면, 소망을 두고 자랑하려 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며, 여전히 자연인의 본성입니다. 타락한 그 자체입니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를 자연인이라고도 하지만 새 성향을 입은 모습에서 보면 옛사람, 옛 성향입니다.
이들 역시, 동일합니다.
“ ~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세상이 언제나 시끄럽고 요란하고 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성향은 물질과 자기중심적이기에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평화를 운운하지만 평화도 없고 정의나 공의도 없습니다.
가정도 복음화, 직장도 복음화, 시대도 복음화가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 성향의 새사람이 모인 곳에는 땅에 것이 아닌 위엣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긍휼이 있고 거짓이 없으며 평강이 넘칩니다.
“골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종종 새사람이 되기 위한 자구책으로써, 이름을 개명하고 성형도 하고 옷차림도 바꾸지만 본성은 어쩌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님이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서, 죄인 된 나를 전혀 다른 의인으로 살리십니다.
나의 힘이 아닌 주를 믿는 믿음 안에 새사람이 되었음을 확실히 하십시오.
그 증거가 새 성향이고 그 보증이 성령님의 내주하심입니다.
3) 부활의 삶
이제 성도에게는 새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성령님이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무거운 명령이 아니며 도덕운동도 아닙니다.
새 성향의 의지를 사용해서 습관이 되도록 하라하심입니다.
“~생각지 말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옛사람, 옛 성향은 행동하지 말고 새사람 새 성향을 따라 살라하십니다.
“골312) ~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17)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국내의 팔씨름 왕을 보았습니다. 우락부락하지 않은 청년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용을 쓸 때 그는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기는 비결은, 팔씨름 할 때 쓰는 근육이 발달된 덕이랍니다.
꼬부랑 할머니를 보셨을 것입니다. 오랜 노동의 습관이 그처럼 몸을 만든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습관이 되면 쉽습니다.
여러분은 새벽기도회가 어려울 겁니다. 고난 주간 때 전교인새벽기도회를 하니 안수집사님이 일어나서 푸념을 하더랍니다. “이 새벽기도회를 누가 만들었나?” 누가 만들었나요? 주님이 그러셨습니다. 새벽기도회는 주님의 습관 중 하나였습니다.
또 어느 할머니 권사님은 사경을 헤매는 때에, “예배하러 가야지 예배하러 가야지” “목사님~목사님”했습니다. 평소의 습관이 무의식중에도 들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에 주 경외함의 마음을 담아야 됩니다.
오랫동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로 의지활용에 실패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성장은 경이적인데 비해서 성숙은 온전치 못한 데는 이 의지활용이 약한 탓입니다.
환자들의 재활을 보면 “아야, 아야” 하며 비명을 냅니다.
의지가 강한 이들이 재활에 성공하듯이, 부활신앙이 삶으로 이루어지는 데는 성도 개인의 믿음의지가 작용합니다.
성령님은 코치시기에 대신 해주시질 않습니다.
“10절)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미인이 되기 위해서? 건강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나요?
주님은 나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 공로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습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부상당한 야생동물을 치료하고 야생적응 훈련을 시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수고로 많은 다친 야생동물들이 야생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동물도 야생적응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더하지 않겠나요?
우리에겐 주의 성품이 심겨 졌습니다. 그 성품대로 살아야 행복하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옛 성품과 옛 습관이 새 성품을 누르고 살기에 스스로 영혼이 탄식하고 기도가 막히며 세상에 탄식이 그치질 않습니다.
옛사람, 옛 성품은 주와 함께 죽었고 땅에 장사되었습니다.
새사람, 새 성품이 주어졌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과 대속하신 주님을 따라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결론) 사도바울은 이 부활을 자랑했고 이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려했던 장본인입니다.
부활의 자랑은 비교적 쉽습니다. 믿음의 내용이고 입술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려했다는 노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습니다. 곧 다시 살기 위한 시도입니다.
결혼서약은 평생에 1번했기에 준행하지 못한다는 구실이 되지만, 이 부활권능에 참예함은 매년 이루고 있으니 구실이 않됩니다. 새 성품의 새사람으로 성숙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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