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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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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4-12 13:59 조회 95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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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의 만남 막16:1~8 2015,4,12

 

예수님의 부활은 객관적 역사의 사건입니다.

내가 믿던 못 믿던 상관치 않습니다.

이미 이루워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사건이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때 절대적 방편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확실히 하시고자 성령이 오셨습니다.

 

1) 부활과 성령

하나의 등식이 성립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오신 성령으로 믿음의 내용이 되고,

그 오순절 사건은 부활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에게 부활절이 되게 했습니다.

 

이 후, 제자들은 불신과 두려움으로 떠는 제자들이 아니라 담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제자들의 기록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행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부활은 머리로 이해할 사건이 아닙니다.

분석하고 실험할 사실도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내가 믿을 수 없는 나의 구원의 일입니다.

 

내 발의 범죄로 주의 발이 못 박혔고, 내 손의 범죄로 주의 손이 못 박혔고, 내 마음의 범죄로 주의 가슴은 창에 찔렸습니다.

머리의 가시관은, 내 머리의 범죄의 값이었습니다.

 

내가, 우리가 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죄를 해결 못합니다.

*죽음을 해결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만이 이 일을 해결하셨습니다.

죄 사함의 방편으로써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심판하셨고,

죽음에서 살리도록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 구원과 영생을 선물하시고자 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이 하나님이 이룩하신 구원을 내 것으로 믿게 하시고 믿음은 받게 하심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라이언 가문의 4아들이 전쟁에 참전해서 3아들이 죽었습니다.

미국정부는 그 마지막아들을 보호하려 존 밀러대위와 8명의 대원에게 구출명령을 내렸습니다.

최전방의 아들을 구출하면서 그 9명은 다 죽었습니다.

밀러대위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그리고 잘살아야 돼~”

훗날 백발이 된 라이언은 밀러대위 묘소를 찾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밀러대위님, 다리위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잘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누구인가요?

성도는 주의 십자가를 나의 사건으로만 믿을 뿐 아니라, 그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의인들입니다.

지난 주일의 본문을 상기해 보십시오.

골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2) 갈릴리에서 만나자

주님은 돌아가실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길, 부활하면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 갈릴리로 먼저 가셨으며 마침내 그곳에서 11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루살렘에서 만나지 않고 갈릴리일까요?

예컨대 고난 받고 죽으신 서울이 아니라 왜 일산 호수공원 일까요?

 

만남에는 언제나 비밀이 있습니다.

오전의 만남은 이성적 만남이라면 저녁의 만남은 감성적입니다.

길거리의 만남은 자유만남이라면 정해진 곳의 만남은 형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 형식도 돈까스집이나 순대국집이 아닌 정식집이라면, 상대가 부담스런 존재란 의미입니다.

 

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인가요?

예루살렘은 주님께도, 제자들에게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고장인 반면, 갈릴리는 주님을

만난 첫 추억과 아름다운 사랑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고장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고향을 찾거나, 늙은 부부가 젊은 시절의 셋방을 찾는 모습을 상기해 보십시오.

 

주님은 그 제자들을 갈릴리로 초대하여, 부활의 증인으로써 새 소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은 모든 것이 마쳤다할 그때에 새롭게 난 새 길이고 산 생명이고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3년 동안 주를 따르며 배웠지만 주님을 다 배반하여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에서는 확실한 부활의 증인으로 소명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그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막16:14~15)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결국 이들은 약한 제자에서 능력의 담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인가요?

주가 만나자하신 그 갈릴리는 어디인가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설레임을 갖고 갈 갈릴리는 어디인가요?

내가 회복될 수 있는 그곳은 어디 인가요?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곳이며, 주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그곳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실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호렙산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폭풍이 불고 불이 떨어졌지만, 그 보담 이후에 들리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산에는 참 목자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길 잃은 양 같은 성도들이 참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들만 확실하면 저들을 다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만, 혹 저들은 자기의 귀가 가려워서 맞는 말을 골라 다니는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 일산만이 아니라 어디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바로 부활의 주를 만나지 못한 성도들 일 수 있습니다.

귀가 가려우면 곤란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주의 음성을 듣고 부흥되는 부활 신앙이 됩니다.

 

3) 부활 삶

우리는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고 새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 있고 실패한 신앙과 무너진 신앙에서 재건 할 수 있습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착각하기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인 냥 오판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를 만났고, 그의 보내신 성령의 능력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기 전에, 다시 주안에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현대는 속도전입니다. 너무 이성적입니다. 그리고 너무 실용적이고 너무 효과적이라는데 염려가 됩니다.

디지털시대라도 신앙마져 디지털화 될 수 없습니다.

너무 그렇게 된 것이 문제입니다.

 

부활의 삶은 죽어 천국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담대함과 거룩함을 따라야 합니다.

이후 제자들의 증인된 삶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였나요?

주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면서 당한 고초를 보십시오.

이들에게 후회와 원망은 없었습니다. 이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행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자이시기에 부활의 능력도 있습니다.

주님도 그렇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는 무엇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른 나무가 봄 되면 물을 끌어올립니다. 높은 것은 수십 미터로 올립니다.

상식적으론 이해되지 않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과학은 이 모양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생기입니다.

 

결론) 오지 선교사 한분이 귀국해서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그 선교지에서 예수전하다 받은 고초와 그 중에서 믿게 된 이들이 있음도 보고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선교에 필요한 기도와 일꾼을 부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선교보고 후에 한 소년이 찾아 왔기에, 선교사는 소명 받은 일꾼인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외의 말을 했습니다. “선교사님, 그 나라에도 우표가 있지요? 난 우표수집이 취미인데 그 나라 우표를 구해주세요?” 귀한 선교보고를 우표수집으로 맞춘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은 어디에 맞추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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