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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기나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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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8-23 21:47 조회 1,05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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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검색의 시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스마트폰으로 다 검색할 수 있습니다.

이 덕에 삶의 질은 빨라졌고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잃은 것이 있는데, 곧 사색입니다, 깊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깊이가 없어진 삶은 어떨까요?

방향을 모른 채 질주하는 활주로의 비행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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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색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 지식인과의 필담을 소개했습니다.

지구와 외계와 같은 우주론에 관한 대화에서 “티끌에서 벌레가 나오며 사람은 모든 벌레 중의 한 족속이다.” 했습니다.

이러한 박지원의 인식은 어디서 온 걸까요? 동양 세계관에서 온 것입니다.

그 발상은 무엇인가요?

 

뿐만 아니라 조선의 다른 선비들은 동물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을 발견했습니다.

한 예로, 어느 고양이는 단속을 조금만 소홀히 하면 음식을 훔쳐 먹었기에 사람들은 천성이 ‘나쁜 고양이’라며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어느 집이 그 고양이게 먹이를 잘 주며 잘 기르자 그 고양이는 더 이상 훔치지 않아 ‘좋은 고양이’라며 칭찬했답니다.

그래서 그 선비는 탄식을 했습니다. “어진 주인을 만나면 어진 본성이 나오고 재주도 제대로 쓰이지만 만약 도둑질 하고 다닐 때 잡아 죽였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요즘 귀뚜라미가 울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가곡 같고, 누구에게는 시장상인의 떨이를 외치는 소리 같은 귀뚜라미의 울음이, 다른 누구에게는 흉측한 벌레의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잡아 죽였고 그 죽임으로 자책도 받았습니다.

몇가지 궁금함이 있습니다.

왜 노래가 아니라 울음이라고 했을까요?

왜 다른 정서로 느꼈을까요?

그리고 잡아서 죽인 것으로 자책이 왔을까요?

 

정조는 소나무를 해치는 송충이를 잡으라했습니다.

사람들은 송충이를 잡아 땅에 묻었고 그 다음에는 묻은 송충이를 잡은 송충이로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잡은 송충이는 태워버리자고 했고 정조는 생각 끝에 “이것도 생명이 있는 것인데 태워버리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며 반대하다가 폐단도 없애고 원한도 막는 현명한 방법을 제시했는데 “벌레가 바다에 들어가면 물고기와 새우로 변한다고 한다. 지금 부터는 송충이를 주워 해구에 던지도록 하라”는 어명을 다시 내렸답니다.

 

이젠 가슴으로 읽는 한시를 소개합니다.

“해결하기 힘든 세상일도 잘도 해결하고

어리석은 자는 현자로, 지혜로운 자는 걱정꾼으로 만드네.

개원이란 글자가 분간되나 달이 찌끄러진 듯하고

제부처럼 둥글어서 물 흐르듯 굴러가네.

온갖 물건을 헐값 만드니 권세 정말 무겁고

일천 집안을 파산시키고도 욕심을 그치지 않네.

이자 놓고 재물 부리느라 거간꾼들 바쁘니

서민도 하루아침에 제왕처럼 변하누나 “ -신석우 1805~1865, 돈-

 

뭐에 대한 시인가요?

 

위의 모든 사안의 특징은 검색이 아닌 사색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일은 무리지어서 되질 않고, 철저한 독립된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잠언서와 전도서가 무엇인가요? 검색이 아닌 경건한 사색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도 미루어 살필 줄 알아야 됩니다.

행17:11~12)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도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실 때 대체로 그물을 깁거나, 고기를 잡거나, 세관에 앉았거나한 일꾼들을 부르셨는데, 유독 무화과나무아래 있던 자가 있었는데 나다니엘이었습니다.

그는 쉬거나 낮잠을 잔 것이 아니라 사색 중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습을 보고 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색, 가장 사람다움의 성향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도 절대적이기에, 주님은 “너희는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른다.” 책망 하셨습니다.

 

2) 광야에서

모세는 40세까지 애굽의 모든 학문과 학술을 다 배운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었습니다.

어쩌면 검색의 달인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색이 부족하여 외눈박이가 되어 한쪽만 보았을 것입니다.

민족사랑도, 열심도, 지식도, 한쪽만 보면 위험 합니다.

 

그의 한 사건이 이를 웅변합니다.

출2:11~13)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느니라 ~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감성적일 뿐 이성적이질 않았습니다.

결국 모두의 불행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40세의 모세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큰일을 이루기보단 오히려 그르칩니다.

 

무엇이든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이론은 모범 답안이며 현장은 실제입니다.

이론이 실제에 적용되려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반복과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학교나 학원에서 과정을 통해 배우고 다시 현장에서 견습생이 되어 또 배우는 것입니다.

현장 경험이 많은 것, 이 눈높이가 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센머리 앞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그 지혜를 공경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는 세월이 절대적입니다.

 

애굽의 왕자인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써 현장을 배웠습니다.

양치는 기능인 보다 사색의 신앙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 가장 요청되는 것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사색, 중세에는 있었던 신앙모습이 현대에는 없습니다.

수도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이 필요가 없으니 기도원도 수도원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효과만 따지는 시대의 신앙이라서 그렇습니다.

 

길섶의 꽃을 보고 묵상하다가 찬송한 적 있나요?

무수한, 영롱한 별들을 보며 위엄의 하나님을 묵상한 적 있나요?

집짓고 새끼 기르는 동물과 곤충을 인생과 비교한 적 있나요?

그러나 뉴스의 사건과 사고만 접하다 보면 실의와 짜증만 충만합니다.

 

미디안 광야의 모세는 아주 작은 일상도 간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출3:2~3) ~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큰 숲에는 나무마다 부딪혀서 산불이 곧잘 일어나듯이 광야에도 불붙는 나무가 흔합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불꽃이 사라지지 아니하는 관경을 보고 이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궁궐의 모세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뉴턴의 만유인력은 어찌하여? 의 관심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요?

과수원의 사과는 그전에도 떨어졌는데 모두가 스쳤을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호기심을 느끼나요? 어디에 가슴이 뛰고 발걸음이 옮기나요?

개인적으론 모세의 이 모습을 발견하고 지난 한주간이 좋았습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누구의 말대로 어디로 왔다 어디로 가나?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돈돈 하는데 그 돈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데 왜 호기심과 궁금함이 없는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느낀대로, 보는대로 살아선 않됩니다.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도들과 제자들은 고난을 기꺼이 받았나요?

왜 모세는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광야생활을 더 좋다고 느껴야 했나요?

이는 검색으로 발견할 수 없는 영생의 극치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왜 영생을 취하라했나요? 이 역시도 궁금함과 호기심으로 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능력은 없게 됩니다.

 

3)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는 그 나무 앞으로 나가다가 동시에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생애 전화점이 된 사건입니다.

출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대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애굽의 궁궐에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장엄하고 신비한 일이 발생한 겁니다.

누구든지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영성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친구간에, 가족간에도 교통을 못해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럼에도 하나님과의 교통이라니, 광야에서의 유익이며 광야를 통한 주의 은혜입니다.

 

모세의 외모는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볕에 그을린 피부와 거친 발과 손, 남루한 행색,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치 아니하시기에 모세를 먼저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민족구원이라는 엄청난 임무를 주셨습니다.

 

어느 재벌총수는 금번 8,15광복절 대사면으로 출소할 때에 성경만 손에 들고 나왔습니다.

분주한 일상에서는 스쳤던 성경을, 작은 감옥 방에서 서너 번 보았다니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되었다면 기대해도 좋을 모습입니다.

 

결론) 어느 방송사는 인기 예능프로를 강원도 평창에서 했습니다.

무려 3만 명이 입장하고 2만 명이 되돌아갔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치우지 않고 남긴 쓰레기는 모두의 양심이었습니다.

검색하는 이들이 모였지만 사색 없는 이들이 남긴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창조 후에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니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으신 줄 믿습니다.

기능인으로써가 몸만 아닌 사색인으로의 마음도 다하는 예배자가 좋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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