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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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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6-02-07 15:27 조회 91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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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장로님이 전도사인 외아들을 향해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살았다.” 며 권면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생각과 묵상이 많았습니다.

 

1) 광야생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일은 건강하기 위하여 자연식으로 먹고 산일이 아닙니다.

 

*참 가난해서 그런 것입니다.

현대의 목사가 만약 그렇다면 어떨까요? 주변머리도 없는 목사라면 타박 받고 목회는 쪽박이 될 것입니다.

노회나 총회에서는 아무런 기여도나 충성도 없는 만큼, 찾거나 알아주는 이가 없어 묻히기 쉽상이고, 가족들에게서도 배척당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샌드위치나 호떡으로 연명을 하며 단 벌 옷으로 살고 거리에 나가 “예수천당 불신지옥”만을 외친다면,

 

교인들도 이런 목사를 마음으론 존경해도 그 교회를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생활적으로 부담스럽고,

설교는, 죄와 회개를 외치니 듣고 싶은 설교와 거리가 있을 테고,

무엇보다도 위로, 행복, 풍성함을 받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졌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함입니다.

국가의 흥망성쇠, 개인의 생사화복은 물론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가 팔리는 것도 주관하신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에게는, 은을 돌처럼 흔하게 쓰도록 흥왕케 하신 반면 세례요한에게는 왜 가난하게 하셨을까요?

 

솔로몬은 금수저출신이였지만 더 흥하여 다이아몬드수저로 상승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은혜의 힘을 옳게 사용한 흔적이 없고, 주지육림에 쓰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분단시키는데 단초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정략적인 결혼으로 이방여인들을 맞이하여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기게 한 구실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솔로몬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성 싶습니다.

 

그러나 세레요한은 달랐습니다.

그 가난 중에도 광야에서 외친 복음으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자복하고 세례 받도록 인도하였습니다.

마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시종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알 기도합니다.

 

2) 영적 음역대

공중에 나는 새는 막 나는 것 같아도 자기들만의 길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높은 하늘을, 참새는 낮은 공중을 납니다.

 

고래들은 종류에 따라 언어가 다릅니다.

또 방송사도 주파수가 다릅니다.

극동방송은 106.9, 기독교 방송은 98.1, 문화방송은 95.9,

이 주파수 따라 내용이 다르고 청취자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부자의 소리에, 권력자의 소리에, 지식의 소리에 귀 기우리며, 행복, 위로, 번영에 움직이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복음에 귀를 기우리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리와 외침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 소리는 회개촉구요, 다가올 심판이었습니다.

소리가 근사하고 외침의 내용이 좋아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기에 이 소리와 외침이 들린 줄 믿습니다.

 

외국 어디를 가도 우리말은 귀에 들립니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에 반응하겠지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겉이 아닌 속에 반응합니다.

죄책감에 부담을 갖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자존심에 부담을 갖는 부류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부류 아닌가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와 심판에 반응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수치에 민감할 것입니다.

훗날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죽으면서까지 촉구했던 것이 무엇인가요? 그의 불륜이었습니다.

왕의 사생활이지만 죄로 보았습니다.

반면 헤롯은 자존심이 지키는 일, 수치스런 일로 여겨 세레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구원의 팔이 짧아서 풍성케 못하심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보십시오.

언제나 환영받지 못할 메시지입니다.

마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그의 삶을 보십시오.

마3: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디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그의 종말을 보십시오.

30대 초반에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약대털옷을 입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사는 생활은 은혜부족이 아니요, 개인의 능력 부족도 아닌 하늘 백성의 표식입니다.

 

3) 가죽 허리띠를 띠고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후손이기에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되는 기득권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아론의 후손으로서 그러나 주 증거자로서,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당대는 제사장이 성전에서 각종 제사로 신앙을 이끌었던 시대입니다.

제사장은 부패했고 성전은 장마당이 되었고 각종 제사는 경건의 모양만 있었기에,

백성들의 신앙은 외식신앙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지만 돈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길 바란다지만 땅 생활에서 영광되길 바라고,

죽어야 사는 신앙이라지만 죽기를 거부한 신앙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같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부자와 성공을 위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목사는 출세자의 반열에 섰습니다.

 

*우리는 광야와 메뚜기와 석청과 약대 털옷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은 하늘 영광 보좌 비워두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사시고 죄인처럼 죽으셨습니다.

마10:38~39)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위하여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주를 따를 수 없습니다.

광야생활에서 주를 전하고 따르는데 유혹과 좌절이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를 강하게 하는 힘은 가죽띠, 곧 진리의 띠입니다.

중요합니다.

주 믿는다고 하다가 주 때문에 실족함도 있지만 죽기까지 따라야 합니다.

*가죽 띠를 허리에 띠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말로만 주님을 소개하고 행위로는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언행일치로 주님을 증거하고 그 첩경을 예비했기에, 주님으로부터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다.” 라는 존귀를 들었습니다.

 

모세, 엘리야, 세례요한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요?

*요단강에서 끝나고 시작되었습니다.

*모세, 엘리야, 세례요한 등, 한 결 같이 청빈했습니다.

*앞선 종은 예비자이고 나중 종이 구원을 이루웠습니다.

 

결론)훗날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은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신앙의 회의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보낸 주님의 조치는 일종의 간접 면회였는데, 애둘러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마11:5~6)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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