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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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변덕은 같은 사안인데, 어떤 때는 낙심되다가 어떤 때는 괜찮기도 하고,
또 같은 사람인데도 어떤 때는 좋다가도 어떤 때는 원수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가요? 지혜와 능력이 언제나 일정하신 분이기에 신실하다고 믿습니다.
이런 변덕의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위대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소망되신 하나님으로 믿다가도, 어느
때는 존재도 의심스럽고, 공의로우심과, 사랑하심도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믿는 모두의 모양입니다.
1) 예레미야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주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렘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
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레1: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한 시대의 많은 인물 중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대언자로 간택된 인물입니다.
렘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소위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들은 어떤가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풀어서 메시지를 발견하여 대언한다면,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임한 메시지를 받아 대언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위엄과 대언한다는 스트레스는 대단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직통계시를 현대에도 받는다면 어떨까요? 신비를 넘어서 이단입니다.
여하한 예레미야는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리된 시대에서 몰락해 가는 남유다를 향해 바벨론과 앗수르 제
국으로부터 멸망 받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하면서 상황이 너무나 위중하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소귀에 경 읽기 식으로 무시하니, 그 결과가 보여
슬픈 선지자가 되어 울고 울어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 눈물의 기록이 뒤편에 있는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렘16: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렘17:12) 영화로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시며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렘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이보다 앞서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렘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때의 구원자시여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만 이 고백이 곧 달라졌습니다.
렘14:8~9)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오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
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시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
서
한마디로 예례미야가 믿었던 평소의 하나님답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하며 그 이유를 반복해서 묻습니다.
예레미야의 변덕인가요? 아님 하나님의 이상인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그런 일이 없었나요?
2) 친밀한 관계
사람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진정한 관계는 내가 누구를 얼마나 아느냐 보단 상대가 나를 얼마나 아느냐 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알아도 대통령은 우리를 모르니 진정으로 아는 관계가 아닙니다.
여기에 친숙함은 더욱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직통계시를 주시고 그 백성을 죄에서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시기에..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는 이 친숙함을 보여줍니다.
아니 불경한 것인가요? 무지한 건가요? 아닙니다. 아주 친숙하기에 반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호렙 산에서 대면했다고 했기에 친숙한 정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구원을, 의로움을 잘 나타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본래는 그렇지 않으시잖아요. 그런데 지금 왜 그러시는데요. 화내시고 징벌하시고 후에는 구원하시잖아요. 왜 잠
잠하시나요? 갈 바를 모르는 나그네처럼, 놀랜 사람처럼 왜 넋을 놓은 것처럼 그러고 계시는 데요?”
그러므로 불경건도 아니고 무지도 아닙니다.
이런 간구! 누구나 할 수 있나요? 무지한 듯하거나 불경한 듯해도 친숙한 관계에서는 있습니다.
이 친숙함이 달라짐을 간파하고 어찌하여,,의 질문을 갖습니다.
동물에게 스킨쉽과 때림의 동작은 같습니다만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킨쉽은 작은 동작이라면 때림은 큽니다.
동일한 어찌하여,,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무지와 불경건은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그러나 친숙한 관계는 깊으면 깊을수록, 믿음만큼 유익과 영광을 구합니다.
3) 어찌하여
우리도 하나님을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토록 수고한 모세를, 하나님 말씀대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하지 않고 지팡이로 두 번 쳤다고 해
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셨는가? 소심한 A형 사람처럼,
어찌하여 이스라엘을 징벌한 바벨론, 앗수르, 애굽 등을 멸망하셨는가?
욱 잘하는 통에 사리분별 못하는 사람처럼,
이유를 알 수 있나요? 솔직히 모릅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분이기에, 섭리도 신비하여 알 수 없습니다.
오늘본문은 이런 하나님, 본래는 그렇지 않은데 본심을 숨기시고 엉뚱한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답입니다.
어찌하여,, 인가요? 소심한 A형이거나, 욱하거나, 나그네 같거나, 놀라 벙벙하는 경우처럼,,
*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올뺌이는 야행성인 만큼 빛이 죽음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의로움은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때론 숨기시고 환한 태양이 되셔도 초생 달처럼 은은히 나타내시곤 합니다.
향수는 본래 냄새를 숨기기 위해서 존재되었답니다.
프랑스궁전은 화장실이 없었기에 오물 냄새가 컸답니다.
이때 오물을 피하기 위해 하이힐도 존재된 것이랍니다.
향수의 본고장은 이태리도 미국도 아닌 프랑스이고 제일로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숨기거나 가리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께는 기쁨이고 만족이어도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만큼, 사람에게 선글라스를 씌우셨는데,
곧 본래대로 아닌 이 땅에서 거류하는 나그네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신 것이며 훗날에 그리스도가 사람으
로 오신 것이 그 핵심입니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나중을 생각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근시안적입니다.
당장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통치자시고 운행자이시기에 먼 미래도 감안하십니다.
망원경적인 섭리를 이루십니다.
당장에 그 백성을 구원하시면 구원받은 백성은 좋겠지만 나중에는 어떨까요? 그 후손들은 하나님을 잊고 떠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만이 좋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기록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대미는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오묘한 맛은 달고, 짜고, 시고, 맵고, 떨러름의 오미가 잘 합쳐져야 하는 이치처럼,
우리 삶에 실패, 성공, 부유, 가난, 죽음으로 성화와 영화로 인도하십니다.
* 전체를 생각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데는 여러 가지가 맞물려야 했습니다.
바로의 강팍함이 부러질만할 때가 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는 가나안을 개척할 만한 충만함도 있어야 했지만, 저들이
멸할 가나안 7족속의 죄악도 차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전체를 모릅니다.
말씀해 주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욥에게,
욥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았거든 말할지어다
욥40:8)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어린아이입니다.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보다는 믿어야 합니다.
결론)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경외했습니다.
세상 모두가 듣지 않고 외면해도 혼자는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렘14: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찌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
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이해, 하나님의 존중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어찌하여 할 수 있나요? 그만한 궁금함이 있나요?
자라는 자녀들이 아빠 엄마에 대한 궁금함이 없다면 어떨까요?
이상함도 모른다면 어떤 건가요?
어찌하여,, 어찌하여,,는 우리도 취하여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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