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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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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6-09-25 14:11 조회 88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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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와 밤은 같아도 다릅니다.

밤송이는 찌르는 가시가 있어 누구도 먹지 못합니만 그 속의 알밤은 좋습니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1) 성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식양을 주어 만들게 하신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은 이동식 광야예배당입니다.

처음에는 4색실로 짠 천으로 덮개를 씌우고, 그 다음은 염소털 덮개이고, 그 다음은 숫양의 가죽이고, 마지막으론 해달의

 가죽으로 웃덮개를 했습니다.(출26:1~14)

 

대속의 의미와 보온과 자연보호의 기능을 다 갖춘 셈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해달의 가죽은 볼품이 없습니다만

이 해달의 가죽은 비와 바람과 햇볕을 막아줍니다.

염소털은 보온이고, 숫양의 가죽은 속죄의 의미입니다.

마지막 4색실로 짠 덮개는 안에서 볼 때 아름다워,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나도록 몇 개의 성막이 소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내용을 변개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성막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보이는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사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인물도 없었고 풍채도 없었으며 무시할 수 있는, 괜히 싫은 그런 상입니다.

신분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 나사렛 산동네 출신, 전형적인 흙수저였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질 때에,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며 회의를 가져야 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해달의 가죽으로 덮힌 성막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그 속에는, 4색실로 짠 덮개처럼 아름다운 신비가 있었습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추상적이지만 나중에 제자들은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이와 같은 모든 의미가 함축된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 십자가와 십자가의 도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집행틀입니다.

생긴 것은 단순해도 끔찍한 도구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아름다운 이유는 십자가의 도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성경대로 돌아가셨기에 우리의 믿는 내용이 됩니다.

 

예수님은 실제 죄인이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힘이 부족해 돌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실수된 재판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예언대로 그 백성의 속죄를 위해 희생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과 예언자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범죄한 아담하와에게 한 동물이 희생한 것부터 시작해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애굽에서 해방된 것이, 다 십자가의

 대속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를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리라 하

시니라

 

돌아가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셨기에, 믿는 자에게 소망이 되고 생명을 줍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으로 득도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현세의 무병장수를 추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요,

나의 생명주로 믿는 일입니다.

죄 사함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일에 성령으로 보증을 받고 그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 평생의 삶

에 동행하시는, 거룩하고도 순결하고 엄청난 영광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

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즉 위엄과 존귀를 이룹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일이 하나님을 믿는 일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도를 믿는 일에 언제나 거리낌이 있습니다.

3) 거침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옛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불기둥 구름기둥의 표적을 따랐던 탓에,

이 신앙으로 볼 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게 보일뿐입니다.

그러나 이 표적을 바라는 신앙은 늘 표적을 바라기에 표적이 신앙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아시기 바랍니다.

마귀도 표적을 냅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서 표적을 보이니 바로의 술사들도 따라했습니다.

표적이든, 기적이든 가장 확실한 표적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표적을 바라는 이들에게 “나는 요나의 표적을 보이노라”

하셨는데 곧 자신의 부활이었습니다.

이는 표적보다 그 주체를 믿으라하심입니다.

 

또 헬라인들은 철학과 신화를 만든 민족입니다.

공교한 지혜와 사고의 산물이지요.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어린양 대속과 부활은 논리적으로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지금도 이런 거리낌이 여전합니다.

현대는 얼마나 과학적이냐를 따지고, 얼마나 멋지냐를 봅니다.

 

유감되게 이들은 밤송이만 보고 밤알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입니다.

이들은 성막 겉에서 해달의 가죽만 보고 성막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 사도바울도 그랬기에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안에서 본 후 십자가 도를 자랑했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옳게 보기위해서는 겉의 십자가가 아닌 그 십자가 도를 보아야 하며 장막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고백이 달라집니다.

고전 1:24~25)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고백은 십자가 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심은 죄인에 대한 살리심입니다.

죄는 죽고 나 같은 죄인은 살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감탄과 고백이 있나요?

 

또한 주님과 하나님을 생각하면 어떨까요? 먹먹함이 항상 차오를 수 있습니다.

내게 사랑을 주신 부모를 생각하면 늘 죄송함과 그리움을 갖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합니다.

그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결론) 밤송이를 제거하는 데는 도구와 기술이 필요하고, 성막이해에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일은 역사적 안목 외에, 내가 그와 함께 달린 것을 믿기 위해서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이 일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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