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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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개똥같지 않고, 개똥같이 살지도 않았는데 개똥벌레라는 억울한 이름을 안고 사는 곤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1급수 청정지역에서 살고, 가장 환상을 안기는 31럭스의 빛을 어둔 밤하늘에 비추는
데, 이름하여 ‘반딧불이’입니다.
이 반딧불이는 짝짓기위해 불을 밝히고,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보름동안 헤매이다 숫컷은
짝짓기 후 바로죽고, 암컷은 알 낳은 후 죽습니다.
아주 장엄한 죽음입니다.
그래서인지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밤하늘의 은하수는 반딧불이의 영혼이랍니다.
1) 그리스도인
이런 개똥벌레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이라" 했고, 현대는 "개독인"이라 불리움을 받지만, 이들은 1급수 청정의 거룩한 삶을 살
고자 하며 어둔 세상의 빛의 사자로 삽니다.
누군가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의 삶의 목적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영광이기에 순교적 삶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들은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으며 예수님의 신부로 삽니다.
이처럼 사는 힘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를 알고 그에게 연합된 믿음입니다.
이 영성의 정도 따라 세상을 이기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지키지도 못한 체 망가지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환난을 이기고, 나누어 줄만큼 확실했는데 현대는 그렇지 못해 유감입니다.
2) 영성의 비결
그 영성을 더하고 더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행3:1) 제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저들은 주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입니다.
주의 고난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던 증인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과의 일을 추억으로만 여기지 않고 삶에 연관시켰습니다.
기도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좋은 자동차는 최신형이 아닙니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하여 관리 잘 받은 자동차입니다.
피아니스트도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단원이 알고, 삼일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독한 연습벌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 우리의 믿음은 닦고 조이고 기름 친 만큼 빛을 발합니다.
그 결과 구걸하는 걸인에게도 관심을 갖는 인성이 갖추어지고 “일어나 걸으라” 할 만큼 담대해 집니다.
행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러나 영성이 없으면 인격과 삶은 천박해져 “ 니 아부지 뭐하시노” 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모든 것을 물질로만 평가하게 됩니다.
대기업회장들이 운전수에게 갑질하는 일도, 외국인노동자들을 천대하는 일도 여기서 발생하곤 합니다.
* 예수그리스도로 풍성해야 합니다.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걸으라 하고
사도들은 세상 것에는 아주 가난했어도 예수그리스도는 풍성했습니다.
사람들은 두 주인을 못 섬기니 하나를 취해야 합니다.
저들이 성전을 찾은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영성의 유지 비결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을 위할 것이냐? 영을 위할 것이냐?
시대는 달라져도 예수그리스도로 풍성하다면 바른 영성을 지닌 것입니다.
* 섬기고 나누는 삶입니다.
행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뭐든 뺏는 것과 주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뺏는 것은 빈곤이 아니라 탐심의 작용이고, 뺏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불행은 여기서 옵니다.
그러나 준다면 큰 사람입니다.
빈곤과 인색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세상에서는 가난할지언정 영적으론 인색할 수 없습니다.
물질로 나누지 못하면 그를 위해서 축복이라도 하기 때문입니다.
3) 영적권위
기독교의 참 권위는 능력이 임합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을 잡으러 온 무리가 “나사렛예수가 누구냐” 했을 때, 주님은 “나다”하셨지만 그들은 엎드러졌습니
다.
참 권위에 눌린 것입니다.
가짜 권위는 권위적인 것입니다.
우상이 웅장하고 우상의 신전이 요란한 것이 그 반증입니다.
기독교는 시작은 마가의 다락방인데 성령이 불꽃같이 임했습니다.
종교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빈속일수록 겉이 거창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참 권위가 있었습니다.
행3:6) ~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나면서 앉은뱅이를 처음부터 주목하여 본 그들의 영성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주었고, 손을 잡아 걷도록 세웠습니다.
현대의 영성과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권위가 있나요?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나요? 기도하지 않는 신앙이고 보니 좋은 교회당은 비고,
은과 금은 있어도 나사렛예수가 없어 약한 자에게 무심하고,
“걸으라” 하는 손잡아 끄는 일도 없어, 일어나는, 치유되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건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 받고, 원수 되고, 갈라지는 사건만 있습니다.
오죽하면 어느 총회헌법은 “다툼이 있어도 세상법으로 나가지 않는다.“ 는 조항을 만들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예수그리스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우리를 보라” 하거나 “일어난 자를 보라 ” 할 수 있습니다만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권위의 궁극으로 주께 영광을 돌렸고, 부활의 주님의 증인으로 섰습니다.
행3:12) ~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3:16)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
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주변의 기도부탁을 종종 받곤 합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이번 일이 잘되면 주의 일에 드리도록요.” 그런 사람일수록 지금껏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일이 안된 것도 아니라 믿음 곧 영성이 없어서입니다.
이들은 “주세요주세요” 하는 평생 거지 신앙입니다.
사업가나 정치인으로서 수완은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없기에 인격과 삶에 권위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은 자신만 보일뿐 주변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신앙은 있어도 나누지 못하고 자신이 인정받길 원해 주님을 높이질 못합니다.
오히려 이런 신앙 때문에 주변에선 시험 드는 일이 많아집니다.
결론) 모든 물질에는 물리적 법칙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영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성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기독교영성은 그리스도가 주체입니다.
성도의 영성은 주께로부터 와 세상에 비추입니다.
무엇을 갖고 있습니까? 얼마나 갖고 있습니까?
저들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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