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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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은 구주성탄의 달입니다.
라디오에선 벌써부터 캐럴이 울리고 곳곳에는 성탄트리가 주 오심을 빛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간단한 기록으로 남겼지만, 여기저기에 반복 기록되어 있어 그 중요함과 사실을 표현하
고 있습니다.
1) 동거하기 전에
요즘 성문화는, 청춘들에게 물어보면 개방적이고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퇴색적이라 할 것입니다. 성문화는 언제나 결혼 후
이어야 건강하고 아름답고 건전합니다.
그럼에도 결혼이 늦어지니 선 동거 후 결혼이 많아졌고 이 와중에 선 출산도 있어 “ 아기는 혼수품이다” 는 웃푼말도 있습
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아주 특별하고 신비스럽습니다.
“동거하기 전에” 남녀의 사회적, 생물적 결합이 있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신 많은 잉태와 출산이 등장합니다.
100세 된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이 대표입니다.
오죽하면 그 아들을 ‘이삭’이라 했나요? “하나님이 우리를 웃기셨다” 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100세에 아들을 얻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또 생각해 보세요
할머니가 젖을 물릴 테니 사람들 보기에 여간 민망스러울 테니,
쌍둥이 잉태와 출산도 있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아브라함의 손자들은 복중에서부터 다투었습니다.
그들은 커서도 다투었는데 에서와 야곱입니다.
훗날 두 민족이 되어 지금도 다툽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하심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다 동거하므로 잉태되고 출산된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진 않았습니다.
2) 성령으로 잉태된 것
그러나 예수님의 나심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오시기에 죄성이 없어야 했는데,
만약 동거 후에 잉태되었다면 자연적인 잉태인 만큼 구원받을 자요, 메시야를 기다려야 할 죄인에 불과하여 그리스도의 의
미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이삭을 늙은 아브라함이 낳았기에 신비가 되었습니다.
만약 젊어서 낳았다면,, 자연적인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시험관 아기가 어떤 경우 인가요?
남자의 씨를 시험관의 난자에 수정시켜 어머니 몸에 넣는 진보된 의술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잉태는 어떨까요?
시험관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릅니다.
성령으로 남자 씨 없이 그냥 수정되도록 하셨으니 죄 없는 잉태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이 신비한 잉태로 말미암아 참 신이 참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으니 요셉은 양육에서 아버지가 됩니다.
놀랍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근거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요나가 물고기뱃속에서 나온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설령 물고기가 요나뱃속에 들어갔다 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거하기 전에 성령이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를 믿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건과 기적과 신비와 역사가 기록된 성경의 첫 말씀이 무엇인가요?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하셨느니라’ 가 아닌 ‘창조하시니라’는 여전한 진행형태라는데 주목하십시오.
완전한 창조가 이미 끝났고, 하나님도 창조 후에 안식하셨지만, 그럼에도 그 창조 안에서 여전한 창조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낡은 별은 사라지고 새별이 생기며 오늘은 가도 내일은 새로이 오고 있습니다.
같아도 다른 별이고 시간이고 역사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짧은 단어이지만 성경 첫 장의 첫 말씀이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웅변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무신론적인 잉태설이 아니라 확실한 믿음의 성령 잉태론이
됩니다.
3) 아들을 낳으리니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은 친절하셔서 천사를 보내어 요셉을 안심시키며, 나실 아기의 이름과 소명을 밝혀주었습니
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구의 말씀인가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아들인가요? 호적상으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일지라도 의미상으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아들입니다.
세상에 길고 긴 구약의 시간 속에서 성령 충만한 선지자와 제사장은 많았어도, 이런 성령의 잉태는 없었고, 별별 아들이 다
있어도 이런 거룩한 아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보내심입니다.
이런 일은 인류역사에 단 한 번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찾아주심이고 여전한 살아주심입니다.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
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신비는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이고 목적의 성취입니다. 마1:22~23) 이 모든 일
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말씀도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 가 아니라 ‘계시다’입니다.
어느 때만이 아니라 계속의 계심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고 약속도 곧잘 잊고 떠납니다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잊고 떠나시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자기 백성에 대한 철저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보호의 선언입니다.
구약의 떡 상을 보면 상 얹저리에 손바닥만 한 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고 지키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손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를 대속하셨기에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를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주의 백성이고 자녀이기에 찾아오시고 우리가 진 죄 빚을 대신 탕감해 주신 것입니다.
구주성탄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자 오신 강림절입니다.
이 의미를 잊지 마시고 괜한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길 바랍니다.
4) 동침치 아니하더니
의로운 요셉은 천사의 메시지를 받고 하나님의 알게 되었고 그 뜻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마1:24~25)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
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여러분은 어떤 단어가 눈에 들어오나요?
잠을 깨어? 분부대로 행하여? 동침치 아니하더니? 요셉 믿음의 진수는 동침치 아니한 일에 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벗된 목사님의 교회주보를 보니 나의 북한사역자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주보에 새겨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고맙다는 나의 인사에 목사님은 “마음뿐이다” 했지만 그 마음이 시작이었기에 금번에도 이불 값을 보냈답니다.
우리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네 몸을 빌려서 성령으로 잉태시키신다면 어떨까요?
어느 날 주님이 네 사랑하는 무엇을 내가 사용하시겠다면 어떨까요?
그것이 나를 포기하는 일이고 엄청난 댓가를 치루는 일이라면 어떨까요?
“동침치 아니하더니” 주를 향한 믿음의 결단이고 서원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종종 결단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희생도 합니다.
여기서 머물지 말고 더 나가야 합니다.
정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할 것은 하고 하지 말 것은 만다는 결단과 서원준수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마땅히 자기의 권리를 다 쓰지 않겠다 했습니다.(고전9:12)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이나 사례를 따라서 복음전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직분자로서 값없이 복음전도를 위한다는 취지입니다.
결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심은 정치적인 방문이 아닙니다.
창조주로써 대속을 위한 구원의 방문입니다.
어둡고 답답한 현실에 눈을 돌려 산 소망을 주신 주님을 영접하며 환영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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