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제일교회
홈로그인
HOME · 설교&칼럼

성도와 분노 > 설교말씀

성도와 분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7-02-19 12:58 조회 793회 댓글 0건

본문

분노는 폭발하는 화산의 마그마 같습니다.

주변에 분노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분노는 화라는 멋진 이름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에,

죄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하셨습니다.

 

1) 분노의 이유

분노는 불만족의 감정 표현인데, 화를 잘 내는 기질 탓도 있지만 수양부족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갑질이기도 합니다.

지위나 신분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 싶은 경우로서,

아래나 동급에게 분노하지 강자나 상급자에게 분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얼굴만 붉어지면 낫겠는데, 욕을 하고 폭행과 저주까지 한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순간의 분노는 잠깐 지나가는 일로 여길 수 있지만,

오랜 분노는 자신에게 독을 갖고 오며 인간관계를 해치고 일도 망칩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 집중 단속하는 범죄 중에 차폭이 있습니다.

차 운행 중 진로를 방해했다 해서 앞차든 뒷 차가 보복하는 경우인데,

아주 심각할 만큼 위험하고 많습니다.

이때 클락션 눌러대고 라이트 깜박하는 일은 약소해서 포함되지 않습니다.

가로막거나, 야구방망이로 휘두르거나, 큰 차라고 해서 몰아붙이거나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결국 남을 상해하거나 자신이 범죄자가 되니 신세망칩니다.

 

현대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삽니다.

스트레스는 죄가 아니지만 잘못해소 하면 죄가 됩니다.

이런 경우 자기 수양을 해야 합니다.

받은 스트레스를 발산해서 마음을 안정적으로 다스려야하며,

나아가 위트와 유머로 까지 승화시켜야 합니다.

일전에 용식목사식당에서 나가는 내게 옆의 사람들이 막걸리를 흔들어 따면서,

그 뿜어내는 막걸리가 내게 튀었습니다.

이때 나는 “ 참 재주가 좋습니다. 막걸리로 샴페인을 만드시니,,” 하고 나왔는데,

나중 이야기로는, 내가 목사인 것을 알고서는 “과연..” 했답니다.

 

이러한 분노는 자기를 나타내는 순간기회일 뿐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이나, 자신의 똑똑함이나,

자신의 힘을 나타낼 수는 있어도,

상대방이나 하나님의 의는 가리 웁니다.

상대방도 피치 못한 형편이 있을 것이고, 또한 그러한 분노를 참으면 그 참는 동안에 하나님이 예기치 못할 일을

하실 수도 있을 덴데,

자신이 분노함으로 이런 의와 기회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참을 인(忍) 3개면 살인도 면한다 했을까요?

성도는 분노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해서 “내가 심했다” “그때 미안했다” 는 사과보다는, “참 잘했다”는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어떻게 참으셨어요” 라는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2) 거룩한 분노

성도는 무조건 참아야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아주 열렬히 분노하셨습니다.

거룩한 분노입니다.

성전이 강도의 굴혈처럼 된 것에 대해서 화를 폭발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과 대상이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상스럽지도, 몰상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요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주님은 화가 나셨지만 아주 이성적이셨습니다.

만약 사람을 채찍으로 때렸다면 어떨까요? 큰 시비가 일어났을 것이고,

소를 뒤집어엎겠다고 하셨다면 어떨까요? 웃기는 일이 되며,

돈을 집어 던졌다면 어떨까요? 돈 줍겠다며 아수라장이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분노는 대상과 방법이 딱 맞았습니다.

이 덕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성이지만 사람에게는 인자하셨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죄된 불의에는 분노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모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에게 경배했던 백성들에게 분노했을 때,

그 송아지를 불에 태워 빻아서 가루를 먹게 끔 했습니다.

대단한 분노인데, 민수기 5장에 기록된 저주의 의식을 행사한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 범죄 했을 때, 모세는 자기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외되더라도 백성들이 용서를 탄원했던

자비의 사람이었지만 여기서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수백 명을 직접 처형했습니다.

 

속담에 “받는 소가 밭을 간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유와 겸손이 있어도 이런 열정과 분노도 있습니다.

그래서 싸울 수 있는 투지가 작동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요?

사람의 실수에는 관대했으나 하나님께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실패하지 않도록 본을 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로 세상과 우상과 싸워 하나님의 의를 지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냈습니다.

 

국민들이 정권이나 지도자에게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론 시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론 민주주의답게 투표로 해야 합니다.

북한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에 분노할 이유가 많습니다.

소녀상 설치와 대사관 앞에서 집회 할 수 있습니다만 항시 그러면 곤란합니다.

국가대 국가인 만큼 외교적으로 해야 합니다.

칼끝보다는 펜 끝이 강하고 펜 끝보다는 혀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3) 성도의 분노

현대의 성도들은 어디에 분노하나요?

행여 남대문에서 뺨맞고 동대문에서 약한 사람에게 엉뚱하게 화풀이 하지는 않을까요?

아니 어떤 일에 분노하나요? 내 신앙의 안일과 태만에 분노하면 어떨까요?

롬12:11)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했는데 열심히 없었다면,,

아니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의가 아닌 내 의를 나타내는 열심이라면,,

기독신앙은 철길을 달리는 기차와 차선과 신호를 지켜야 하는 버스 같기 때문입니다.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세계적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400m 계주에서,

동료선수가 금지약물복용으로 판정 나 금메달이 취소되어,

그는 올림픽 3회 연속 금메달이 헛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분노해야 했을까요?

동료일 수 있겠으나 동료를 살피지 못한 자신에게 해야 했을 것입니다.

 

누구든 분노할 줄 모르면 원망이나 운수로 돌릴 것입니다.

제일 간편한 처리입니다.

그러나 내 삶과 내 신앙은 내가 주인공이기에,

잘못되면 나를 탓해야 하고 나에게 분노해야 합니다.

이런 분노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자기 성찰이고 발전의 도약입니다.

 

단정하거나 예쁜 사람은 거울을 자주 보고 단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성도는 성도만의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분노,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질 때 분연히 화를 내고,

자기를 향한 분노,

주 동행하는 일에 게으름과 안일함으로 일관될 때 잠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아시나요?

남에게는 혹독하고 야박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하다는데 있습니다.

자기의 손해에는 예민하면서도, 하나님의 손실에는 비굴하거나 비겁하게 침묵합니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진노하시며 사랑이시기에 한 없이 자비롭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만 믿으려 합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부터 믿어야 구원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은혜를 실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 믿음 소망 사랑 중 그중에 사랑은 제일” 이라 했어도,

불의를 향한 분노가 빠지면 한갓 노트에 적어 논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분노하셨나요?

그 대상은 누구였나요? 왜 분노하셨나요?

목장이든, 사업장이든, 마을이든 죽은 곳은 잠잠합니다.

잠잠히 주를 따르기 보단 의의 분노를 표출하시길 바랍니다.

 

결론) 생명 있는 것은 약동합니다.

불의한 로마에 맞섰던 초기기독교인의 신앙은 산 신앙이었습니다.

성도로써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가리워지는 데는 항거해야 합니다.

주변사람들에게는 화를 내지 말고, 죄를 짓지 말도록 하며,

마귀로 하여금 틈을 타지 못하게 합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