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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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한다는 일은 비용이 드는 번거롭고 피곤한 일입니다.
짐이야 이삿짐쎈터가 옮겨준다지만 그럼에도 일은 많습니다.
아내는 버릴 짐정리는 물론 나가고 들어 갈 집의 청소까지 했고 난 잔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 출애굽을 생각했고 출애굽기의 키워드인 본문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1) 출애굽
성경에는 두 가지의 출애굽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한 출애굽입니다.
유월절어린양을 통한 구원인데,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복지로 들어갔습니다.
둘째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대속으로 세상을 거쳐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입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입니다.
위의 본문에는 이런 출애굽의 중요요소들이 나옵니다.
구원의 당사자는 나이지만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그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고 귀결점은 성결한 처소입니다.
이 구원이 즉시로 이루어졌으나 또 평생에 이루는 삶입니다.
애굽을 나온 것은 당일이었으나 광야생활은 40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이루는 모습을 옛 성도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히11:15~16)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
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
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유심히 봐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나온 그 본향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 저들은 그렇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은 본향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국적을 초월해도 희망은 한결 같습니다.
자신이 여기서 수고하므로 고향의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고, 몇년만 더 고생하면 집장만과 작은 가게라도 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전체 과정을 야곱에서 볼 수 있습니다.
“험악한 나그네 세월을 살았나이다.” 구원 받았기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삶은 손해이고,
양보이고, 희생이었기에 험악한 세월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완성은 마침내 죽을 때에 증명되었습니다.
요셉의 자녀들을 축복했고 자기 지팡이머리에 기대에 하나님께 경배했기 때문입니다.
나온 본향도 없고 들어갈 나은 본향이 없다면 절대로 이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같기 때문입니다.
2) 나그네
인생이 나그네임을 조금만 생각해도 압니다.
그런데 대체로 나그네 되기를 거부합니다.
이것은 새가 새임을 거부하는 일과 같아 허투른 수작인데.
새는 날기 위해서 뼛속도 비우고 먹는 대로 배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요? 나그네임을 안다면 머문 곳에 공을 들이지 않고,
짐이 작아야합니다.
쉽게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와 탐심으로 최고의 탐식자가 되었고 최대의 안정자가 되었습니다.
사자와 악어를 보십시오.
실컨 먹고는 몸이 둔하여 늘어지게 잡니다.
여기서 사냥꾼에게 잡힙니다.
부자일수록 죽는 일과 떠나는 일을 겁냅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바지저고리 입었던 민족인 만큼 유랑보다 안정을 더 택합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는 도전과 모험은 두려움이었기에 한 번도 외침을 한 적이 없고,
이런 관습은 지금도 여전하여 신앙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교회당은 물론 구역을 옮기는 일조차 못하고 있는 일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믿음으로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긴 교회들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으나,
그때 주저앉았던 교회들은 지금은 줄어드는 추세가 된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이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추구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믿음의 도전과 모험에는 오미자 맛이 있습니다.
오미자가 무엇인가요? 살콤달콤한 맛인데, 본래 다섯 가지 맛이 종합된 것입니다.
안정은 한 가지 맛,, 오직 편안한만 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 삶의 맛은 알콩달콩한데, 인생의 모든 맛의 종합상자인 것입니다.
야곱이 그 맛을 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과 맛을 추구하나요?
여러분의 마지막에 무엇을 붙들겠나요?
자녀들에게 무엇을 넘겨 주겠나요?
천상병 시인의 ‘귀천’ 이라는 시를 아시나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란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이 시인이 부자였을 것 같나요? 거지였을 것 같나요?
시인 중에 살아서 유고집이 나온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인들은 박정희 정권 때 고문 받았기에 죽었다고 믿었는데,
춘천행려병자 병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9세기의 같은 미국 땅이지만 흑인노예들의 찬송과 기도는 백인 농장주들과는 아주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는 것이 해방이었기에 죽기를 기도했고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그들의 노래가 증명하잖습니까?
그러나 백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는 땅이 천국이었고 그 땅에서 잘 먹고 잘살기를 구했기에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3) 의인의 고난
의인에게는 항상 고난이 많습니다.
주님도 사도들도 초기신자들도 다 이 고난을 겪었습니다.
고난은 구원을 값지게 하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고, 믿음을 정금되게 합니다.
악인의 고난과는 목적이 다릅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구원 받았고 또 구원을 이루어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성도가 설령 악인의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하나님은 진노 중에 긍휼을 베푸시며 쓰러져도 아주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 세우십니다.
이런 경험을 두려워 마십시오.
죽은 물고기를 먹으려면 어판 장에 가야 되고, 활어를 먹으려면 바다에 가야 되듯이,
산 은혜를 경험하려면 믿음의 나그네, 출애굽을 이루어야 합니다.
현대의 교회는 간증이 없습니다.
현대의 기도에는 감격이 없습니다.
현대의 신앙에는 기적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셨나요? 뭐든 다 갖춘 안정된 신앙 덕입니다.
중대형교회들을 선호한다는 최근 현대교인 성향이 나왔습니다.
안정을 선호한다는 결과 아닌가요?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행해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합니다.
훈련소에 가면 “땀 흘릴 만큼 전장에서 피 흘리지 않는다.”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라 하실까요?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괜한 고난 보다는 구원을 이루는 복음적 생활의 고난이 가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죄악 됨에서 구원받아 성결한 처소로 인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떠났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과정이고 여정에 있습니다.
세상사는 동안 나그네입니다.
날마다 눕고 일어남으로 죽음과 부활을 훈련한다면, 나그네도 훈련하십시오.
떠나는 훈련, 버리는 훈련, 자족하는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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