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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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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7-04-16 13:55 조회 72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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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에 사는 한 교포가 고향을 다녀가면서 개나리 가지를 갖다 심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났지만 개나리는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한국과 같은 혹한의 겨울을 지나지 못해서였습니다.

이를 춘화현상이라고 하는데 백합, 란, 튤립, 철쭉 등 많이 있습니다.

 

어찌 식물뿐인가요? 동물도 그렇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사람을 깨우칩니다.

흔히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며 경계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겨내면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나옵니다.

일종의 내공이고 면역인데 유익한 작용이 됩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떨까요? 썩어 없어져서 망하는 듯해도 부활로 이르게 합니다.

문제는 어떤 부활이냐 악인으로의 부활이냐 의인으로의 부활이냐 가 관건입니다.

 

1) 죽기를 바라는 사람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부활을 모르기에 죽기보다는 지금 여기서 살기를 바랍니다.

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떨까요? 마귀는 이를 이용하여 그 사람을 죄짓게 만들고,

하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복음의 영생을 전하고 누리게도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과 죽음에 참예하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는 죽음이나 고난까지 마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딱 하나, 주의 부활과 복음적인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예한 것입니다.

빌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

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그야말로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심한 예수환장증인데 의인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는 그가 1,2,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쇠사슬에 매인 채 예수님을 증거 한 것을 압니다.

오죽했으면 그때 아그립바 왕이 “사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 했을까요?

그러나 그는 “이처럼 묶인 것 말고는 당신도 나처럼 되길 원합니다” 했습니다.

아니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이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왜 그런가요?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부활로 간주해서 고난과 죽음에 개의치 않은 이유입니다.

이 부활신앙으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사랑했던 것을 포기하며 예수께만 주목하고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

은 것이니 곧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2) 하나님의 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되고 부활하심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세상에 의가 많습니다.

보편적인 의가 있고, 시대와 상황적 의가 있고 개인적인 의도 있습니다.

다 주관적인데 마치 미의 기준 같습니다.

춘향이가 현대에서도 미인일까요? 서양미인이 동양에서도 그럴까요?

이 사람 저 사람의 미의 기준이 다르듯이 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의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표준입니다.

그 의에 모든 것이 미치지 못하거나 넘친다면 죄가 되고 죄인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타고난 유대교적 의식과 투철한 종교성을 갖고 열심히 율법을 준수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의요 그 준수가 의를 세우고 받는 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으로 예수를 신성 모독하는 이단으로 보았고 기독교인과 교회를 적대세력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빌3:6)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의 의가 맞지만,

율법을 준수함으로 그 의를 세울 수 없고 또 그 의를 자기화 시키지 못했습니다.

너무 완전한 율법이고 죄인은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이유는 죄를 깨닫는 용도로 주셨음을 비로써 은혜로 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세우나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모든 죄를 대속했기에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고 또 믿는 자도 의롭다함을 얻음을,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 됨을 계시로 믿게 된 것입니다.

롬10:2~4)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

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3: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

라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

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미국 경제대공황 때의 일입니다.

한 노숙인 할머니가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왜 도둑질을 했나요?” 노숙인은 4일을 굶어 배가 고팠다고 진술했습니다.

판사는 그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면서 “ 이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그동안 나는 너무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죄를

참회하는 의미입니다.” 이어 판사는 방청석을 향해서 이 분이 밖에 나가서 다시 빵을 훔치는 일이 없도록 뜻이 있는 분은

자율적으로 벌금을 5센트씩 내십시오.“ 했습니다.

자율적으로 47달러 5센트가 모금되었습니다.

이 판사는 이렇게 함으로 법도 세우고 사랑도 실천했으며,

노숙인도 살리고 많은 사람을 자비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정받아 뉴욕시장까지 지낸 라과디아 판사이고,

훗날 그의 훌륭한 덕행을 기념해서 뉴욕에는 라과디아 공항이 생겼습니다.

 

3) 부활하고자

주님의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 때에 내 죄가 죽고,, 주님 부활할 때 내가 의인으로 산 것으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믿는 만큼 적극성을 발휘한 것입니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우리는 무엇을 믿나요? 그 믿음을 어떻게 입증하나요?

최근 한 여배우가 죽었습니다.

많은 동료들이 와서 한마디씩 했는데 비슷했습니다.

“천국에서 편히 쉬면 좋겠어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에요”

천국을 믿는 듯해도 행위가 없다면 결국 믿지 못한 것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창조부터 영생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고 타락으로 영혼의 죽음이 왔으며 마침내 육체의 죽음까지 온 것입니다.

이 죽음 앞에 영생하고자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고, 독재자들은 자기 시신에 방부제를 넣고, 현대는 냉동 처리하고,

후손들은 묘자리를 잘 쓰기도 하지만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고 설령 산다한들 또 죽어야하는데 둘째 사망 지옥입니다.

 

죄는 나쁜 균 같습니다.

어디든 부패하거나 오염시킵니다.

주님의 고난은 죄의 고통으로 말미암은 고난이고

죽음은 소독제나 정화제가 아니라 죄의 대한 끝장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새 시작인 것입니다.

누구든 죄 아래서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기 원한다면 믿음으로 주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장사되고 부활해야 합니다.

사람은 죽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거듭남은 이 생명이 심겨진 그 때입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충만한가요?

너무 세상 것으로 충만하지 않나요?

평일 아침에 마두역을 나가는데 온통 차가 막혔습니다.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뉴코아 할인행사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행복하게 산다는 가치추구인데 무엇이든 결국 예수 밖에서는 허무입니다.

 

빌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우울증환자처럼 죽기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살기위한 죽음이고 고난 참예입니다.

 

식물도 혹한의시기를 거쳐야 향기 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잠시잠깐 사는 세상에서 고난을 통해 복을 믿게 되고 죽음을 통해서 천국의 삶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 진실에 첫 열매입니다.

 

결론) 우리는 어찌하든지 살려고 합니다.

또 어찌하든지 잘살려고 해서 화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어찌하든지 해야 할 일은 부활에 참예하는 일입니다.

개인이나 세상적인 어찌 하든지는 잠시 소용이 있을 뿐입니다.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주님을 푯대로 붙잡아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이미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는 믿음의 애씀이 있어야 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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