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받을 때에
페이지 정보
본문
최근 식사를 함께했던 장로님은 담임목사님에게서 시험을 받고 기도원에서 토요일과 주일을 보낸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설교를 들었다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 믿음이 훌륭하다는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주님에 대한 회의로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 “오실이가 당신이니
이까?” 하며 물었던 세례요한을 보며 위로 받았답니다.
세레요한도 흔들림이 있었으니 자신도,, 자신쯤이야,,하며 다위성을 찾은 것입니다.
1) 시험받을 때에
이처럼 흔들리는 신앙적 시험 때는 세례요한만이 아닌 성도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확실히 “시험을 받을 때에 ”라며 명시했습니다.
그 시험내용이 무엇인가요?
약속으로 받은 아들, 그 독자이삭을 제물로 바치라함이었습니다.
이런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나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망설임 없이,
창세기를 보면 “새벽에 일어나” 지체 없이 순종한 것으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주님도 많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참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것은 죄가 없으셨기에 시험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가장 큰 시험이 무엇이었을까요?
돌을 떡 되게 하여 먹는 일이였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위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죽음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마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
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좀 더 원문대로라면 “ 아빠, 40세가 못되어 주는 일이 억울합니다” 가 포함되었습니다.
이런 시험은 특별한 때가 없습니다.
또한 특별한 사람이나 사안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깨어있어야” 합니다.
시험에 있어서 참는 신앙과 이기는 신앙은 복됩니다.
2) 영광의 십자가
이런 시험의 드는 경우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예수신앙은 이해의 사안이 아닙니다.
그 신앙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을 어찌 이해할 수 있나요?
오직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뢰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걸려 넘어지고 실패하는데 마귀의 궤계입니다.
어떻게 고목 같은 영감 할머니에게서 난 아들을 바치라 할까?
어떻게 주의 길을 예비한 종을 죽게 하실까?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면?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으니 사신신학도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양은 보이는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만 믿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광 속에 계시지 않고 오히려 감추십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영광의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구유에 오시고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를 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처형했던 것입니다.
현대교인들의 신앙이 허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번영의 신앙 위에 영광의 십자가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경우 현대인들이 삶의 질은 좋아졌는데 나약해졌습니다.
감기독감과 아토피가 잘 걸리고 건강식영양식을 섭취한다는데도 결핵이 늘고,
그 이유는 면역성이 떨어진 이유입니다.
면역성은 왜 떨어지나요? 편한 생활과 과도한 약물 복용 등이 이유가 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다릅니다.
고난을 좋아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합니다.
예수를 찾는 이유의 대부분이 이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고난이 해결 안 되니 다시 떨어지길 수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죽음을 해결하면 간단하게 끝납니다.
예수님이 영생이기에 답인데, 예수자체는 불신하고 고난해결에만 매진하고 평안행복성공 등의 세속적 기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회가 한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약 13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미국의 교회가 후회하는 일이 하나있답니다.
번영신학을 뿌린 일이랍니다.
아니 뿌렸다기보다는 우리네 교회가 따라한 것입니다.
적극적 신앙, 긍정적 신앙, 믿는 대로,, 바라는 대로,, 꿈꾸는 대로 된 답니다.
여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어디 있나요?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이를 살리리
라 하시니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잃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
꾸겠느냐
주님이 목숨을 포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 뜻대로 한다면 시험에 들겠지만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찾으니,
하나님을 믿으니 영광과 번영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고 독자까지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고난의 십자가
한국교회의 기초를 세우고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의 묘원에 가면 고난의 십자가를 졌던 선교사들을 비석에서 볼 수 있습니
다.
모두가 귀하지만 루비 켄드릭이란 여선교사는 조선에 온지 8개월 만에 풍토병으로 순직했습니다.
25세의 일생입니다.
그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가 비문으로 남았습니다.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리라” 그녀의 고난의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죽음을 이해 할 수 있나요?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죽음이 미국에 소개될 때 오히려 조선에 많은 선교사들의 자원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영광을 나타납니다.
주님의 죽음도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되었기에 많은 이들을 살리고 주님 자신은 재림과 심판의 왕으로 영광스레 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던 것입니다.
히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릴 줄을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
은 것이니라
신앙의 시험 받을 때는 신앙의 정도 만큼입니다.
청년들에게는 사춘기도 되고 어른들에게는 갱년기도 되고 폐경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상한 일도 아니고 때도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이성적 지식도 아니고 경험적 연륜도 아닙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완전하시고 전능하시고 원수에게 보수하시고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형들에게 팔려 노예로 애굽에 갔던 요셉,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들어갔던 요셉을 상기하십시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원망과 비관도 없었습니다.
훗날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결론)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그것이 무엇인가요? 지금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현상들 아닌가요?
팩트를 믿는다면 과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을 믿습니다.
독생자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창조주하나님을 성경대로 믿고,
시험 때에 우리의 시험을 앞서 경험하신 주님께 나가 도움을 구합시다.
- 이전글주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추수감사) 17.10.22
- 다음글중요한 일 17.10.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