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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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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7-12-03 13:40 조회 72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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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동물학자가 인문학 강좌에서 외국학자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1953년도는 인간이 DNA를 발견한 최초의 동물이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이 인간의 DNA를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DNA는 인간과 그 삶을 주도하는 주체라고 했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자신은 이를 깨닫던 때에 허무주의와 염세에 빠져 생명포기라는 극단적 생각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강의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았던 심리적 공황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1) 성경적으로

그러나 과학은 여기까지입니다.

과학의 진보이고 진력한 결과지만 과학에는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고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과학은 지극히 제한적인,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학문이고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과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작은 것은 현미경, 먼 곳은 망원경, 밤에는 투시경으로 보듯이 하나님은 믿음과 성경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창세는 무엇을 말하던가요? 요한계시록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천국과 지옥 그리고 장차 임하실 예수님까

지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한 사람을 위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관한 인간은 성경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데 있습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이 죄가 믿음을 가리워서, 유식하면 유식한대로 무식하면 무식한대로 온갖 인문학이나 과학을 인용

하여 자기 불신을 합리화 시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적 인문학과 과학은 하나님계시인 성경을 믿는데 치명적 독이 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우리 교육은 진화설에 근거했습니다.

성경과 반대됩니다.

이런 교육바탕과 생각위에 다른 학문과 기술을 또 쌓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탕부터 기둥도 서가래도 철저한 무신론이 됩니다.

아님 기껏 믿는다는 것이 귀신이나 도깨비나 죽은 조상설 정도입니다.

이 일은 심각한일입니다.

세계관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학교교육 보다 앞서 가정교육을 성경적으로 교육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들어 크리스챤 대안학교들이 좋은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려가 있습니다.

학생중심의 아카데미 전당이 되면 더할 나위 없지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교수중심의 유니버시티가 된다면 지금처럼 교

육보다 경영에 초점이 맞춰지기 쉽습니다.

세계를 부흥으로 이끌었던 영국의 부흥은 명문대학의 정치가나 과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경건한 부모로부터 경건한 가정교육을 받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도와 성경을 배우고 거룩한 가풍의 삶을 익힌 사람들이었기에 하나님에 의해 큰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이런 교육과 성경에서 납니다.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딤후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

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 확신하노라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

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느니라

 

나쁜 설교와 좋은 설교가 있을까요? 차이가 무엇일까요?

좋은 설교는 믿음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나쁜 설교는 믿음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모든 설교가 다 나쁠 수는 없어도 수사학적설교는 성경적 설교 보다 못합니다.

 

어느 원로목사님의 책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하루 4시간을 성경을 읽는다는 목사님은, 회고하기를 평양에서 공부했을 때는 수사학적 설교를 배워 설교했는데

피난 나와서는 성경적 설교를 배워 설교하니 교인들의 믿음이 자라더랍니다.

내겐 고무적이고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적 설교라도 처음에는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인문학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생소한 분야는 눈이나 귀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대하면 마음이 열리고, 믿음이 들어오면 재미있고, 말씀이 경험되면 새사람이 됩니다.

여기에 진력해야 합니다.

 

2) 경건의 훈련

기도와 묵상을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호흡은 자연스러워야 건강하듯 기도의 건강은 무시로 기도할 수 있어야하며,

감사와 모든 사람을 위한 간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우리의 기도는 이방종교기도타입입니다.

내 소원만 많이 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도를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키셨습니다.

해녀들이 물질을 위해 숨 참기와 숨고르기를 터득해야 하지 않나요?

기도는 좋은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는 핏줄 같아서 기도할수록 믿음은 좋게 자랍니다.

 

또 묵상은 상고입니다.

깊이 생각함입니다.

숲을 보고도 나무를 볼 수 있는 지혜이고 안목입니다.

뵈뢰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행17:11) 뵈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

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생각하므로 믿음이 들어왔습니다.

차거운 신앙이 뜨거운 신앙으로 가는 모양인데

이런 상고의 훈련은 영육에 아주 좋은 보약 같아 좋습니다.

딤전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3) 믿음의 교제

성도의 교제를 사도신경에서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했습니다.

성도에게는 두 가지의 믿음교제가 있습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과 연합하고 교제하는 수직적 교제,

그리고 애찬을 통하여 성도간의 교제하는 수평적 교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성도간의 교제만 이루는 현상이 있는데 잘못된 일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먹고 마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을 나누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철은 철로 연마하듯이, 성도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함께 성숙해집니다.

 

믿음은 급조할 수 없습니다.

김치가 항아리에서 익어가듯이 성도의 믿음도 세상에서 죄와 부딪치고 교회 안에서도 시험도 들고 하기를, 하면서 자라납

니다.

명태가 동해 덕장에서 해풍에 얼었다가 녹았다가 반복하며 말라야 맛과 색이 드는 이치입니다.

믿음이 홀로 좋아지기는 어렵습니다.

감옥에서의 존 번연은 믿음이 좋아서 감옥 간 것이지 감옥에서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성경과 경건서적을 보며 경건생활 한다면 나아질 수는 있습니다.

 

현대는 홀로시대입니다.

직장에서도 동료를 부담스러워 하고, 이웃과도 소통이 없어 혼밥 시대가 되었으니 교회에서도 이 현상을 어떻게 못하기 쉽

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 유념하고 진력해야 합니다.

 

결론) 교회에 다녀서 믿음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큰 교회라서 큰 믿음이, 좋은 교회라서 좋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한 거룩한 영향을 내가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자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나를 믿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라”

마음을 열고 의지를 작동하십시오.

여기에 진력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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