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나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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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맞이하면서 친구목사님은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때 제가 발인예배를 집례했었습니다.
설교 후 집례자로서 형제간의 화목할 것을 당부했었습니다.
고인은 어머니였기에 좋은 관이나 멋진 비석을 쓰기 보다는 형제의 화목을 원하셨을듯 했기때문입니다.
1) 주님의 뜻
주님은 참 하나님이심에도 인간적인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곧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 마5:20)” 하시면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 보다 나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말씀하셨고,
그 의의 열매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함부로 욕하지 말 것과, 화목할 것과, 간음치 말 것과, 헛맹세를 말 것 등,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쉬워 보여도 실제는 어려운 일들입니다.
한두 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될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희는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에 익숙한 나머지, 종교적인 일에
는 적극적이었으나 실제에는 소홀히 했습니다.
이는 주의 의를 세운다고 했으나 마치 자기의 의를 세운 것과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기형적 신앙모습이 여기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합니다만 칭찬을 듣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전답을 팔고 부모형제를 외면하는 일도 감수했어도 이런 의의 열매가 부재되어 온전히 주를 따르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둘을 균형 있게 해야 합니다.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의 의, 경건한 의,
둘 다 잘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인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의이고 열매가 됩니다.
눅11:42) 화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왜 주님이 바리새인들이게 화를 내셨나요? 종교적인 것, 하나님관계적인 것만 전통적으로 붙들었을 뿐, 실제적인 것으
로 개인적인 경건의 능력, 인간적인 의미의 사랑은 놓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옳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럼이 “너희는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의 구현이 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예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나요?
모이기를 소중히 여기고, 주일을 성수하고, 거룩한 예배당에서 헌금위원들 조차 성의를 입고,
예배회복운동을 펼치고 등,
그러나 실제는 교회가 무기력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인구절벽과 사람들의 마음의 강팍에서 구실을 찾았지, 예배의 실패가 무엇인지, 예배자인 우리 안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몇가지 더 나은 바를 여러 곳에 말씀하셨는데 곧 산제사가 되는 줄 믿어야합니다.
성경의 특징은 계시인 만큼 한꺼번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숨겨두신 일입니다.
비밀을 위해서 랍니다.
2) 나은 바
*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하셨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체 전리품을 갖고 하나님을 제사했을 때 사무엘선지자가 지적하고 책망했던 내용입
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
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
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제사는 구약적 개념이고 현대는 예배라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바는, 멋진 예배 보다는 순종이 있는 실제적 삶을 더 낫
게 여기고 이 예배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한주간의 몇 시간을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그 모습이전에 실제적으로 위의 내용 같은 의와 사랑에 관한 순종이 있
어야 합니다.
이제는 긍휼입니다.
얼마큼 원하실까요? 제사보다 더, 순종만큼 입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
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특별히 “배우라” 하셨으니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긍휼을 받아 보셨나요? 긍휼을 베풀어 보셨나요? 자비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상대방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충분히 헤아려 주는 배려입니다.
주님은 이 긍휼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이고 사람이 살고 살리는 주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갇힌 자를 동정하고,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고 등등,
아는 목사님들과 점심을 하러 친구목사님 교회를 찾았습니다.
작은 교회당인데 문을 안에서 걸고 우리를 기다렸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자주 귀찮은 사람들이 와요”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떨까요?
성경공부를 하면 무엇하나요? 이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과연 어떨까요?
운행 중에 방송을 들으니 끝나는 멘트가 나왔습니다.
청취자들의 반응과 소감을 소개했는데 “구좌번호를 알려주세요, 작게나마 돕고 싶어요.“ 가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목사사모가 목사남편이 별세하신 후의 생활과 심정을 사연으로 올린 듯했습니다.
귀한 신앙들이었습니다.
이 긍휼은 말세일수록 단어조차 실종되고 있습니다.
사나운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긍휼이 있는 자에게는 긍휼 있는 심판을 약속하신 것을 볼 때,
믿음의 의는 능란한 기도나 능력의 은사보다 긍휼함입니다.
이 긍휼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고 찬송 중에 하나님의 머무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도 유심히 대할 말씀입니다.
예물보다 형제가 화목하기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제사보다 낫다고 여기시는 내용입니다.
현대는 실용적입니다.
감사도, 수고도, 충성도, 효도도, 사랑도, 다 돈으로 환산합니다.
말만 갖고는 헛소리이고, 물품이 남아도니 물품도 자칫 푸대접 받고, 상품권도 돈만큼 못하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물보다, 우리들의 화목이랍니다.
내가 주님과의 화목이 아니라 내가 내 형제와의 화목을 낫게 여기신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의 화목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녀된, 백성된, 교회된, 우리의 화목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받을 예배에서의 예물이라는 진수성찬 보다 더,
그래서 주님이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긍휼히 없는 것도 사실은 긍휼이 나빠서도 아니고,
몰라서도 아닌 내가 귀찮고 내가 손해 보는 일이기 때문 아닌가요?
화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는 나, 내가 중심돼서입니다.
교회의 분란이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고치기 않고 의전적인 예배만 고집합니다.
이는 문제이고 어리석음입니다.
현재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알았다면 고쳐야 합니다.
3) 구하시는 제사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또 있습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
시리이다
우리의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됩니다.
불순종했을 때의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화목하지 못하고 긍휼하지 못하고 헛맹세 등을 이루어 거룩함이 훼손되었을 때의 애통함이 진정한 예물이고 이런 예배자
를 찾으십니다.
결론)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별을 따와 예물로 바쳐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처럼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물위를 걸으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인 삶에서 산 신앙이 되고 산 제물로 살라 하셨습니다.
예배와 함께 이 의로움이 열매로 입증되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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