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페이지 정보
본문
십자가는 고대 로마의 사형기구이고,
십자가처형은 죄인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끔직한 형벌입니다.
동산에서의 공개적인 처형인 만큼 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는 본래 달려야할 강도가 있었지만 그는 구사일행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름하여 바라바입니다.
1) 바라바
성경은 그를 강도라고 했습니다.
요18:40)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어떤 사람들은 그를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유대민족주의자라 하며
로마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어도 유대민족에게는 추앙받는 인물이랍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를 살려주길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로마가 풀어줄리 만무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선언대로 강도이고 자기 죄값으로 죽어야 할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변호사를 잘 선임해서도 아니고 보석금을 내서도 아니고 수감생활을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유월절이면 죄인을 놓아주는 선례에 따라 그가 당첨됐고 대신 예수가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18: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
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우리는 이럴 때 “운이 좋다” 고 합니다.
정말 그는 시기와 우연이 좋게 겹친 것입니다.
만약 유월절 전에 처형되기로 작정했다면 어땠을까요?
나무에 매달려 저주받았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잡히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여지없었을 것입니다.
그를 상상해 봅시다.
죽음을 인지하고 고통스럽게 연명하고 있는데 간수들이 왔습니다.
어쩌면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되레 석방이랍니다.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 죄를 자기가 먼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한 기쁨과 놀람을 갖고 옥문을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살아났음을 실감하면서 자신을 위해 예수가 대신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감읍했을 것입니다.
롬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
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빌라도와 군중
빌라도는 정치적으로는 총독이면서도 사법적으로는 대법원장 같은 마지막 최종 심리관이었습니다.
국가가 그에게 이런 권한을 위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그의 재판은 구부러진 재판이었고 판결이었습니다.
요19:6) ~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죄를 찾지 못했으면 석방해야했는데 그는 유대교에게 인기작전을 쓰느냐 예수를 죄인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이처럼 재판장에도 불의가 있고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많습니다.
이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재판관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같습니다.
내가 피해자이면 가해자에게 엄벌을 주라고 재판관에게 요구할 것이고 내가 가해자이면 자비를 탄원할 것입니다.
이런 이중성은 무엇인가요? 죄성 때문입니다.
유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은 어땠나요?
예수께서 죄인임을 알았을까요? 아니 억지로 믿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도 살려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선동했습니다.
기독교의 발전은 유대교의 몰락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중적인 자신은 물론 엘리트법관으로 이룬 전문판결도, 또한 종교성이 탁월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심성에도 하나님의 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쓴잔을 마시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돌아가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아버지께 자신을 의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다면 불완전한 세상에서 어떤 제도든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통치자나 재판관이나 선생이나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배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와 섭리가 따를 뿐입니다.
이를 믿는 일이 범사에 하나님을 믿는 일이고 인정하는 일이 됩니다.
무슬림들은 “인샬라”를 주문처럼 사용합니다.
“만약 신이 원하신다면” 이 보다 더 큰 믿음의 고백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면서 실제는 믿음 아닌 경험과 이성과 타산적으로 삽니다.
과연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일이 언제인가요?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을 이루느니라
3) 사나운 시대
주님께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을 불쌍히 보지 않고 오직 이 여인을 통해 주님을 시험하고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시대 보다 신선한 것이 하나있었습니다.
주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하셨을 때 그들은 돌을 버리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떨까요? 돌로 치는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감추고 자기 눈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의 티를 크게 보는 죄성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이 얼마나 많은지요?
여론을 형성하고자 선동하고, 법관의 판결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시대는 전문가가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직무대리인이 무용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성향에 맞으면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고 맞지 않으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시대적 현상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자 합니다.
바라바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어땠을까요?
강도죄는 물론 어떤 죄도 짓지 않고 죽는 날까지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 바라바가 현대에 산다면 어떨까요?
결론) 바라바는 현대의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난 나입니다.
이들은 누구를 향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외치지 않습니다.
다만 구세주 예수님에 대해서는 평생에 감사하며,
스스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 살려고 발버둥 칠뿐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