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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8-03-26 10:07 조회 49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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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신앙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명절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무교절은 어떤가요? 유월절의미를 더하기위한 유월절부터 한 주간 동안의 명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시 어린양이 희생된 날이고 무교절은 이때 급하게 출애굽하기에 미처 발교되지 못한 누룩 없는 음식을 먹

던 회상이고 기념입니다.

 

유월절이 구원의 해방을, 무교절은 죄 없는,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1) 유월절 만찬

주님은 이 유월절 마지막만찬을 통해서 성찬식이라는 성례를 제정하셨는데

레오날드 다빈치는 최후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이때의 광경을 그려냈습니다.

 

주님은 이때 떡을 떼어 주시며 (막14:22) “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기에

이 때부터 성찬식은 지금까지 기독교성례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죄의 값이 사망인 것은 익히 압니다.

나의 사망을 하나님어린양 되신 주님이 대신 돌아가신 믿음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받으신 주의 고난은 무엇인가요?

죄의 세력의 값입니다.

 

순서로 말하면 고난 후에 죽음이고, 유월절후에 무교절이며, 성찬식에서는 찢기신 살을 대신하는 떡이 먼저고 생명을 대신

하는 포도주가 나중 됩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죽음만 생각하고,

고난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성찬식의 반쪽의미만 새기는 경우와 같습니다.

죽음의 의미처럼 고난의 의미도 찾아야 합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실제의 대속은 고난과 죽음이 다 확실합니다.

 

죄란 이처럼 끔직한 것입니다.

사망이 오기 전에 저주부터 있습니다.

사람에게 죄란 대수롭지 않고 더러는 재미있고 자랑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죄란 대충적이고 대강적이질 않습니다.

호리라도 갚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아 하나님은 독생자에게 뒤집어 씌어 철저히 응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아닌 성찬식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주가 친히 세우신 방편이고

주님을 기념하는 유일한 의식입니다.

눅22:19) “ ~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2) 만찬장

이런 의미의 유월절만찬은 주님께 신중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만한 제자 요한과 베드로에게 준비시키셨습니다.

눅22:8)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사실 주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아도 제자들에게는 당황스런 명령 아니겠나요?

군대 있을 때 이런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PX에 가서 라면 5개 사오고 잔돈을 거슬러 오라” 돈도 주지 않으면서,,

 

그러나 주님은 구체적으로 명령하셨습니다.

막14:13~14)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

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이쯤이면 고마운 명령이고 손에 쥐어주신 명령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앞서 준비하셨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입성 시에 타셨던 나귀도 사전준비가 됩니다.

마2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님께는 이런 일이 참 많았습니다.

물고기를 낚시하면 그 입에 동전이 있을 테니 꺼내어 성전세를 내라 하셨으며,

또 뽕나무위에 있던 세리장의 이름을 “삭개오야” 하면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만찬이 중요해도 사전예약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기 전에 세상모든 만물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은 나의 머리터럭 수효를 아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폭풍과 파도를 다스리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주님이 생각하신 유월절 만찬장은 어떨까요? 감정과 음식을 초월한,

당신을 계시하는 만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님을 기념하는 성찬식은 어때야할까요?

금잔이냐 은잔이냐? 아닌 흰 보를 씌웠느냐? 거기에 십자가가 있느냐? 아님 빵이 크냐? 작으냐? 보다 주님에 대한 나의 믿

음은 어떻고 관계는 어떤가? 성찰해야 합니다.

 

3) 베푼 자리

유월절만찬이 베푼 곳이 여관인지 촌장의 집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큰 집이요, 믿음의 성도집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당시에는 유대교가 주님을 붙잡으려고 혈안이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주인은 객실을 제공했습니다만 누구인지 모릅니다.

마치 오병이어를 바친 소년이 누구인지, 나귀를 드린 주인이 누구인지처럼, 주님은 실명을 공개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하늘에서 상급을 내리시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주인이 낯선 사람들의 청을 따라 집을 공개한 것이고 주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들인 일입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매우 훌륭한 일이고 큰 믿음의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막14:15)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리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라

마가복음은 큰 다락방이 예비된 것을 기록하였지만 누가복음은 조금 다릅니다.

눅22:12)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베풀 큰 다락방이 아니라 이미 베푼, 만반으로 예비된 만찬이었습니다.

이 둘을 합치면 어쩌다 된 만찬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철저히 예비된 만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집주인에게도 이처럼 감동을 주신 일이었음을 의미합니다.

 

현대는 너무 실용적입니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아님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데” 하며 성도들조차 대의나 성령감동을 애써 외면하며 삽니다.

그러나 이곳의 집주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후의 만찬장을 제공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성도는 자기 이름이 알려지느냐 사례가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주가 쓰시겠다” 에 순종해야 합니다.

문제는 “주가 쓰시겠다”는 순종하겠는데 그 말을 전달하는 이를 못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자들과 집주인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집주인과 두 제자들은 주로부터 신임을 받았고,

제자들은 집주인에게도 신뢰를 받았던 것입니다.

신임과 신뢰는 중요한 쌍둥이 덕목입니다.

주를 믿는 성도는 속한 공동체와 시대에서 이처럼 신임과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이일은 말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런 일은 현대의 성도된 나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 ~ 성탄이 되었으니 우리로 먹게 하라”

혹은 “주가 당신의 집, 혹은 자동차를 쓰겠다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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