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그릇의 소금
페이지 정보
본문
믿음의 기도가 있고, 믿음의 행동이 있고, 믿음의 생각이 있고, 믿음의 말도 있습니다.
이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 믿음은 이성도 아니고 감성도 아니고 지성도 아닌 특별한 제 4성의 인격인 영성입니다.
클로버 잎이 각기 있지만 한 잎이듯이, 삼위하나님이 각기 독립적인 인격이어도 결국 한 분이시듯이, 이성감성지성영성이
달라도 결국 한 인격이고 한 인품이 됩니다.
현대는 물론 신앙조차 너무 이성적입니다.
뉴스와 데이터는 믿을지언정 천지창조와 주의 부활과 재림을 믿지 않습니다.
현대 신앙은 어떤가요? 너무 건조합니다.
발라드노래에는 공감하면서 주의 대속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현대 신앙도 너무 지성적입니다.
지식적인 강연에는 호응해도 성경적 설교는 들을 바가 없다면서 외면합니다.
이런 탓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나사렛출신의 주님이 고향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이루지 못한 결과처
럼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유가 인격의 근원인 영성이 죽었거나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영적도착이고 영적쇠퇴로 이어집니다.
한 예로 농사짓는 성도가 그해 농작물을 조합에다 내다팔면서 목사님께 좋은 등급 받게 해달고 기도 요청하지 않습니다.
마침 그 농작물이 1급 판정을 받았다면 그 일이 기도해준 덕이라면서 그 판매금액의 십일조나 감사예물을 드리지 않습니
다.
농부인 자신이 잘 지은 덕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믿음으로 기도를 요청한 것이고 믿음으로 감사 사례한 것이고 그의 영성은 보배급인 것입니
다.
믿음의 사람들 특징이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남녀노소빈부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향합니다.
한나가 아들이 없었을 때 의사부터 찾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리고 성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이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님이 붙여준 사람일 것이다” 하면서 사람만 찾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일 것이다” 하면서 방법만 찾을 뿐,
그 전이나 후에라도 하나님을 찾거나 감사하지 않습니다.
물론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믿음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았던 이런 믿음이 누구의 말처럼 원시사회에서의 유일한 최선책이었다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시대의 최선책은 나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심각한 이단이 있습니다.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이 둘의 균형을 이루는 모습이 성경적 믿음이고 성령 충만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과 성령이 의사를 찾을 때와 주님을 찾을 때를 알게 하고,
방법을 찾을 때와 기도할 때를 구별 짓게 합니다.
건강한 영성은 건강한 믿음을 만들기에 이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바보도 아니고 무당도 안 됩니다.
종종 하나님께 묻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 많던 귀신들은 요즘 어디서 무얼 하나요?”
현대는 귀신 병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있습니다.
그런데 약과 수술로만 치료하려 하니 귀신 병이 없어 보일 뿐입니다.
이상증세를 보이면 분별없이 기도원에 쳐박아 놓고 기도로만 고친다는,
결국은 사람 잡는 신앙도 문제지만 병원이나 과학에만 의존하는 신앙도 문제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궤계가 현대는 어떻게 활동하나요?
정치 탓으로, 정치인의 역할로만 치부하곤 합니다.
그런가요? 정사와 권세가 누구의 지배하에 있을까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어디 있나요? 성도들의 회의와 리더쉽만 강조되면 되나요?
목회도 배워서 하려고 하지 능력 받아 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말은 믿음믿음 해도 믿음의 생각, 믿음의 기도, 믿음의 행동들은 가뭄에 콩 보이듯이 보일뿐 입니다.
이럼의 실제는 무엇인가요? 관습이고 습관이고 종교적일 뿐입니다.
몸만 움직이고 지체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변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고 냄새만 피울 뿐입니다.
주기철목사님 시절 많은 목사님들이 신사참배를 하면서 목숨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민족주의만이 아닌 참 믿음의 목사였기에, 신사참배 거부는 하나님 의를 세우는 신앙으로 믿고 죽을 때
까지 투쟁하다 순교하신 것입니다.
미국 군종학교에는 4명의 ‘불멸의 군목들’을 기리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르친 답니다.
그중 가장 젊었던 클락 폴링목사님은 사고당시 32세였는데,
그는 출항 전 부친에게 기도부탁하기를 “아버지, 저의 안전한 귀환을 기도하지마시고 제가 임무를 다하도록 기도해 주십
시오.” 했답니다.
이런 믿음의 그였기에 미국수송선 돌체스터호가 독일잠수함 어뢰를 맞고 침몰했을 때
잠든 수병들을 깨웠고 자신의 구명조끼를 그들에게 입혔고 자신들은 수장되었습니다.
4명의 군목들이 다 그랬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 하여,
기적만 바라거나 하나님이 다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간구하는 모습만은 아니어야 합니다.
믿음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는 일부터 시작하여,
더 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온전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이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찾는 일이 있고, 노아처
럼 죽는다하는 말씀에 경고를 받아 준비하는 일이 있고, 갈 바를 모르지만 부르심에 순종하는 일이 있고, 늙어서도 말씀을
붙잡는 일이 있고, 시험 받을 때에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있고, 야곱처럼 죽을 때에 지팡이에 의지하여 경배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함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믿음이 인품과 생활을 이끌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요, 종교요, 소리 나는 꽹과리요, 개인적으론 미친 자요,
집단적으로는 이기적 집단이 됩니다.
옛날에 들었던 교회나 성도들의 평가와 현대의 평가를 비교해 보십시오.
왜 그런가요? 물론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우호적이진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비교해 보십시오.
요즘 어떤가요? 왜 그럴까요? 믿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샘을 고치려면 근원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의 근원은 영성이며 우리의 치료제는 거룩이어야 합니다.
새 그릇의 소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염되지 않은 그릇의 소금이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나님의 준엄하신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묵은 그릇의 깨소금이 되고자 합니다.
재미만 추구합니다.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이고 차별입니다.
이 거룩은 성령이 내주하실 좌소이며,
세상이 싸움을 걸어올 명분이기도 하지만 이길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똑똑함이나 세력으로 차별과 승부를 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꼼수와 탈법과 불법을 구사하곤 하여 스스로 거룩을 허는 일들을 자초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방언과 예언과 투시와 능력 행함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런 은사보다 “빛의 열매는 모든 의로움과 진실함과 거룩함에 있느니라”처럼,
관계와 거래와 삶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 새 그릇의 소금 치료 후가 고전 11장이라도 과언은 아닙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새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마귀는 신념과 믿음을 혼돈되게 합니다.
가짜 열광으로 부추킵니다.
나무는 열매로 알듯이 영성은 경건의 능력은 인격이고 인품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