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만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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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은 오늘의 본문은,
권력자와 재벌들의 비리나 갑질을 보는 상황에서 더 실감나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손 가득,, 서민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소유인데 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교훈이 됩니다.
1) 소유의 만족
많은 이들의 착각이 소유가 많으면 행복하고 성공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5:10~11)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눈으로 보는 것 외에 유익이 없답니다.
사람의 탐심이 끝이 없고 소유를 관리하는데 남다른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가치를 찾는다면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기여가 보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늘리는 데만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가난하지만 금실 좋은 부부가 신령께 빌었습니다.
먼저 남편이 “그저 재난이 없이 편안하게만 해 주소서”
이어서 아내가 “아무쪼록 100필의 포목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해 주소서” 했습니다.
아내의 기도를 들은 남편이 못마땅하게 여겨 타박을 했습니다.
‘여보,100필이 뭐요? 많을수록 좋지, 한 1000필을 달라고 빌었어야지“
아내는 어이없이 생각하며 대답했습니다.
“더 많은 것이 생기면 당신이 첩을 들일 것 아닙니까?”
소유에는 만족이 없고 이익 충돌 때문에 평안이 없으며 행복은 더 더욱 없습니다.
전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오죽하면 성경말씀은 “부자 되기에 힘쓰지 말라” 했을까요?
또 “불의한 재물은 중년에 자고새처럼 둥지를 떠나리라” 경고했을까요?
그런데도 이념과 체제를 떠나서 부자가 소원입니다.
자본이나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사회의 윤활제이며 개인에게도 생존의 능력됩니다.
성경은 경제나 돈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자 되기를 힘쓰는 마음을 경계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일만 악의 뿌리가 자라기 때문입니다.
두 렙돈을 헌금 드린 여인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렸는데 곧 삶은 물론 생명조차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한 신뢰였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바가 많아서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처럼,
부자는 이 땅에서 이미 위로를 받았고 나사로는 이제 낙원에서 위로를 받아야 될 것입니다.
2) 한 손에만 가득
한 손에만 가득은 두 손에 가득 보다는 질량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이 시간의 여유가 될 수도 있고,
마음의 여백이 될 수도 있어 총량에서는 오히려 낫습니다.
지혜는 이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아프리카 어부들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대체로 강이든 바다든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만족합니다.
우리 같으면 큰 배와 큰 그물을 만들어 먼 바다에 까지 가서 많이 잡아 애들도 유학시키고, 도시 가서 살 꿈을 꿀 텐데 그들
은 도무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노래와 춤이 있습니다.
우리처럼 명태가 씨가 말라서 명태를 잡으면 현상금을 지불한다는 어촌계의 탄식과는 다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명이다 해서 적극적으로 목회합니다만 이 적극적이라는 것이 위험합니다.
주님은 세계 최고나 한국 최대의 교회가 되라는 사명을 주신 적이 없는데,
적극성은 그 목표를 이루고자합니다.
여기에는 탈법과 위법의 여지가 많고 주변교회와 공존하지 못하기 쉽상 입니다.
결국 탈진하고 물러날 때 물러나지 못하여 지탄도 받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밖의 일이든 거룩한 일이든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내 몫의 일만 감당해야지
오늘 한강의 고기를 다 잡겠다는 식의 무리한 도전은 곤란합니다.
무엇보다 평온함이 없다면 후회만 있고 원성만 살 것입니다.
누구나 삶의 전환점은 한 두 개씩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전환점도 있고, 건강에 대한 전환점도 있고,
저 같은 경우는 목회에 대한 전환점도 있습니다.
미국성회를 갔는데 생면부지의 큰 교회의 부목사님과 여전도사님이 밤에 호텔로 오셔서 인사하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심방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 했고 밤늦게 교회로 되돌아가야 한다 했습니다.
기도회와 회의가 있답니다.
그들에게는 피곤만 역력했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역자였지만 고역자로 보였습니다.
큰 교회는 이처럼 이들의 고역으로 된 것입니다.
또 예배당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아들아이가 학교에서 들은 말을 전해 주었는데 그도 목사님 아들이랍니다.
“자기 아버지가 식사 중에 그러셨는데 저기 제일교회가 들어와서 우리가 곤란하게 되었다”
이 말은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부지중에 교회가 교회를 위협한 꼴이었습니다.
또 유명대형교회목사님 아들이 장성해서 책을 냈습니다.
그가 복음을 들은 곳은 모교회가 아니라 미국 유학 중에 로마서 강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분주했던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무런 추억이 없답니다.
그 아버지목사는 70세도 살지 못했습니다.
목회 성공이 무엇인가요? 그 교회는 후임자로 큰 내홍을 겪고 있습니다.
3) 관계회복
오늘 말씀은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소유에 욕심을 갖기보다는 관계에 신중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좋은 관계는 평온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온갖 탐심을 부추키는 죄는 모든 관계를 망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을 피해 숨게 했습니다.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 고 고백했던 사랑도,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땅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비극이고 불행인 것입니다.
마귀는 소유를 양 손 가득 취하면 이 관계회복이 되어 평온 할 것처럼 속삭입니다.
그러나 관계 회복은 주님 외는 없습니다.
주님은 화목제물이었고 주의 보혈은 지금도 끊겨진 관계회복의 유효한 평화의 다리입니다.
평화, 평안, 평온은 이 결과입니다.
소유에 관한한 자족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빌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
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생각해 보십시오.
형통할 때 감사했을까요? 곤란 중에 부르짖을까요?
양 손 가득히 있을 때 주를 신뢰했을까요? 한줌도 없을 때 신뢰했을까요?
너무 부하게 마옵시고 너무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를 기도해야 합니다.
부하면 주를 모른다 하고 가난하면 주의 영광이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내신 부요는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적당하게 지으셨습니다.
새와 호랑이만이 아닙니다.
남녀노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가난한 자를 괄시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여호와를 멸시하는 일” 이 됩니다.
소유의증가 보다 평온을 잃지 마셔야 합니다.
평온은 관계와 성령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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