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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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선지자는 하나님이 타락한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누구를 보낼고" 하셨을 때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고 성숙했던 만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인자가 아니시고 하늘의 초월된 신이십니다.
이사야는 어떤 존재인가요? 천사가 아닌 땅의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고 행동이 통했습니다.
같은 가족이고 동료라도 통하지 않은 경우가 참 많습니다.
불신과 갈등과 심하면 전쟁도 발생합니다.
1)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는 이렇듯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의 엄청난 간극을 하나가 되게 하고 화평으로 만든 하나님의 소통과 구원의 방
편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인을 만나 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시고 신랑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시작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인간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 사랑에 힘입어 부르심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를 안 믿음의 선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라”고 반복해서 청합니다.
시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95: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기독신앙이 무엇인가요?
부르시는 하나님음성에 믿음으로 화답하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리라” 하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싶다” 하며 마음만 먹는 일이 아닙니다.
즐거이 부르고 무릎을 꿇는 전인격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탐지하거나 행사만 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노를 일으키는 일체의 무지하고 무식
한 일을 그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광야의 옛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이때에 40년간 근심하셨답니다.
시95:10)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들의 광야의 고달픔은 이런 증표였고 결국이었던 것입니다.
시95:11) 그러므로 노하여 맹세하기를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감옥살이 한 것과는 비슷해도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요셉의 고난과 고통은 섭리살이였던 것입니다.
2) 복음화
복음화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근심은 그치고 신뢰와 기쁨이 넘치고,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한 성숙한 화답을 이루는 믿음의 일입니다.
지역의 복음화든 군복음화든 직장인 복음화든 이 일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일인데,
유감되게 이런 복음화는 어떤 복음화든 아직 요원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에게 향하신 사랑은 실화인데 비해 인간들이 하나님께 향한 믿음과 열심과 헌신은 진실치 못해서입
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훌륭한 요리연구가가 되어 각종 좋은 요리를 소개하셨습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친절한 요리가가 되어 손수 지어 입어 넣어주고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향해 동영상으로 경배하며 녹음으로 찬양하고 로봇으로 무릎을 꿇는 모양을 보이는 것과 같습
니다.
한마디로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계인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이거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나요?”를 묻고
일본사람들은 “이거 신제품인가요?”를 묻는데, 우리는 “이거 진짜인가요?”를 묻고,
무슨 말만하면 “실화냐?” 하는데 속고 산 탓입니다.
내게 없던 버릇이 생겼습니다.
전시된 화환이나 꽃을 보면 만져보는 버릇입니다.
꽃박람회에서 몇 번 가짜를 진짜로 오인한 후에 생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시95:3)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보십시오.
시95:5)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대충적인 것이 없고 가짜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나요?
진짜 내 음성을 드려야 하고 진짜 믿음을 보여야 하며 진짜 소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적이고 유아적이고 위선적이 됩니다.
미국천주교 펜실베니아 교구의 사제들이 근대에 벌린 어린아이 성폭행이 엄청 났다고 조사 발표 되었습니다.
생명 없이 종교적이라서 그런 것 아닌가요?
재산 있는 교회나 단체마다 다툼이 큰데 유아적 아닌가요?
오래 믿었다는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해도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으니 위선적인 것 아닌가요?
지금 한국교회는 복음의 변혁 시키는 힘을 잃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발전과 변화는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인지의 영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백번 각오하고 다짐 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깨닫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인지가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으로 새로워야 합니다.
3)오라
그리고 두 번째 “오라” 에는 어떤 응답이 필요한가요?
“넵” 이라는 믿음의 대답과 의지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죄와 구습은 버리는 의지, 내 뜻이 죽는 의지, 청결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의지, 성령 안에서 머무는 의지가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니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면서 이탈된 행동과 행위를 적당화 시키고,
은혜의 하나님이라며 어떤 계명 준수도 율법주의로 간주하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다름과 틀림이 모호해 졌듯이 복음의 정체성도 없고,
성도의 의무도 괜한 헛수고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 하며 자비와 관용만 구하고 있는데 그러나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시95: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말지어다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말지어다” 는 어리석지 말라는 뜻도 되고
주변이나 스스로에게 속지 말라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민족도 집안도 아닌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그 중심은 예수님이 화목제물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존재인가요?
명령에 반응하는 종인가요? 충성된 종인가요? 불충한 종인가요? 어떤 종인가요?
아들은 아닌가요? 집나간 아들이 있고 집안의 아들이 있는데 어떤 아들인가요?
신부는 아닌가요? 라헬이 있고 레아도 있습니다.
종은 삯만 주어지고 아들은 유산이 주어지고 신부는 신랑의 사랑이 주어집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차이가 여기서 있지 않겠나요?
또 내 근심만 하나님이 알아주시길 바랄뿐 하나님의 근심을 아시나요?
그 근심을 이해 할 수 있을까요?
그 근심을 대신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작은 자인가요? 큰 자 인가요?
먼데 있는 자인가요? 가까운,, 친밀한 자인가요?
하늘과 땅에서도 흥망은 내 할 바로 결정됩니다.
흔히 은혜은혜 하는데 그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헛되이 여기는 이유는 누구 탓인가요?
결론) 하나님께 이론적이지만 맙시다.
실제적으로 달려 나가 안기고 안으시길 바랍니다.
공동묘지에도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답니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데 우리는 핑계와 할 말을 초월해야 합니다.
“오라”는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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