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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신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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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8-09-30 15:03 조회 48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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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재림은 우리 믿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 삶과 신앙에 형태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확실성은 어떨까요? 심각한 이단을 만들 수 있습니다.

노동을 금하고 주의 재림만 사모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불확실성은 어떨까요? 신앙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정확성을 가져야 합니다.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모르고,

도적 같이 주의 날이 올 것이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데 곧 근신입니다.

살전5:5~6)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

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1) 선교사 편지

최근 “아프리카선교사의 편지”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익명이기에 날자도 없어 신뢰는 떨어졌지만 벽보에 붙여있는 사진 글이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글을 교회에 나오지 않는 집사님이 보내주셨습니다.

“지난 1년간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주위환경과 분위기에 동요되어 제에 가치관이 그토록 흔들려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안락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무뎌진 신앙과 공허하리만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을 보면서 진

정 구원받을 그리스도인답게 살기에는 이곳 아프리카가 오지가 아니라 대한 민국이 오지 중에 오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과 묵상과 기도가 드라마에 밀려나고 육체의 건강은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챙기면서도 영적으로는 초기암

환자처럼 자각증상 조차 없고 정년퇴직 후 고작 20~30년에 불과한 노후대책에는 놀랄 만큼 계산적이면서도 죽

음이후에 염혼의 대책에는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그리 많은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 땅 한 평, 집 한 채 없는 저희 부부는 오직 열린 하늘과, 하나님만이 노후대책인, 이곳 아프리

카가 고향처럼 더없이 포근합니다.“

 

지금의 우리 신앙위기는 박해가 아닙니다.

삶의 문제들입니다.

더 안락하기 위해서든지 아님 생존하기 위해서, 영적인 고민과 투쟁이 사라진 것에 있습니다.

여하한 어렵고 힘든 시기에는 부르짖어 기도했다면 지금은 그 기도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오직 방법을 찾을 뿐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 이와 같은 상황들을 군인교회에서 봅니다.

지금의 군대는 예전의 군대와 많이 다릅니다.

선크림을 바르고 간식을 많이 먹는 군대입니다.

인권이라면서 인성교육차 종교행사 참석을 권장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임무완수 보다는 안전위주로 훈련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힘들답니다.

자유롭지 못해서 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한이 없고 그 풍요로움은 점점 더 할 뿐입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때에 참 군인정신은 찾아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우리 신앙이 그렇습니다.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고 헌신도 없습니다.

오직 당연 속에 소원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말세에 너희에게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것 같습니다.

 

중국 베이징에 최대 지하교회가 최근 폐쇄되었답니다.

그동안 정부의 교회허락 없는 종교단체로 모였었는데 정부가 CCTV설치를 요청하자 거부했고

결국 페쇄되었습니다.


전후사정은 모르나 신앙정조를 지키고자 정부의 아부나 간섭을 거절한 결과였습니다.

더러는 적당히 타협하지 그랬냐 하겠으나 거룩이라는 순수성을 존립보다 더 확실히 붙잡은 듯 했습니다.

 

지금 중국선교사들이 대거 추방당했습니다.

대신 일부 선교사와 단체는 제주도에 저들을 데려와 신앙수련을 시키곤 합니다.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이 일에 힘쓰는 것은 주 믿는 몸부림이고 주 사랑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2) 깨어 근신할지라

우리는 소시민으로써 주를 믿습니다.

먼 땅에 가지도 못하고 온 사람들을 맞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다 빛의 아들이고 빛의 사자임은 틀림없기에 다른 이들과 같이 세상놀이나 먹고 사는 일에 너무 붙잡히거나 취하지

는 말아야 합니다.

살전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근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근신하는 믿음이 무엇인가요? 정체를 잊지 않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가지 일에 매진 한다면 우리는 하늘과 땅의 일에 매진하기에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해 보이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주는 것이고 희생하는 일입니다.

~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

~불구하고 사랑이 진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내가 사랑하면 무엇이 유익인가 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저가 어떻게 되나 를 먼저 생각하는 일

부터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의 일은 흔히 “소명” 이 강조되는데 그보다 더 강조될 점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희생이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희생했다” “봉사했다” 말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베푸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쁘다” “감사하다” 하여 당연이상으로 여기는데

하나님이 그러셨습니다.

 

*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희망이 개인적이라면 소망은 보편적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개인적인 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로써의 소망이 앞서야 합니다.

 

힘든 시대일수록 희망은 많은데 소망이 실종되어 이기적이기 쉽상입니다.

현대교회가 분쟁이 많은 것도 이 탓입니다.

교회의 유익이나 주님의 영광이라는 소망 보다는 개교회의 이익이나 목회자나 성도의 희망이 강해서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이 계실 수 없습니다.

살전2:16) ~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3)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과 개의 관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이고 구원입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먹고사는 일입니다.

대부분 돈과 쾌락에 몰려 있습니다.

반 고흐가 그랬습니다.

“삶이란 걸어서 별까지 가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별일이 참 많습니다.

친구목사님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다 살아났는데 이제는 작년 12월에 위암수술을 했답니다.

먹지도 못하고 기운도 없답니다.

 

개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물어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땅과 냄새에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아마 거기에 온갖 정보가 들어 있어서 일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기에 신의 성품을 믿음 안에서 회복했습니다.

이제는 땅의 일을 구하기보다는 하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대체로 죽을 일을 생각 안 하고 살 일만 생각합니다.

연세가 드셔도 그렇고 신앙이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믿음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한 번 산수문제 검산하듯 믿음을 검산해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결론) 흔히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은 누가 주인공인가요? 내가 아닌 주님일 때 거룩하고 완전한 예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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