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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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두 강도들도 좌우편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러나 강도들과 주님의 죽음은 달라도 너무 다른 죽음입니다.
강도들은 자신들의 살았던 삶의 상당한 보응이라면 주님은 하나님의 섭리적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1) 구원의 요소
구원에는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믿음보다 더 절대적인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한 강도는 주의 대한 믿음의 고백 없이
오직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으니 제 3자로서는 황당
하기도 합니다.
믿음도 없어 보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도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선물은 전적으로 내용과 때와 방식이 증여자에게 있습니다.
받을 자에게 있다면 상이고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합의했다면 삯이 됩니다.
혹시 들어 보셨나요?
“준다는 것 마다하지 말고 안 준다는 것 뺏지 말라” 일상의 흔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미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인 기회로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기회라지만 그럼에도 아무나 잡을 수 없는 은혜이고 기회가 되기도 합
니다.
이 기회의 기자가 위기의 기자도 되는 만큼 내가 이 기회의 순간에 마주친 때에 믿음으로 잡느냐 혹은 불신으로 놓느냐에
따라 은혜의 기회가 위험한 위기가 됩니다.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행운이나 요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이기에 이 예수님이 구세주인지 아닌지를 건강한 신앙과 정신으로 깨닫고 구원을 주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결단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처지의 강도들이었지만 말과 격이 달랐던 것이고 주님에 대한 태도마져 달라 마침내 한 강도는 영벌에 다른
강도는 영생으로 주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말씀합니다.
고후6:2)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아직은 ‘카이로스’ 의 때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2) 회개의 열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기회로 만드는 방편이 회개와 믿음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후회나 반성을 회개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행동이고 삶입니다.
삭개오가 그 회개를 보여주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특히 사배나 갚겠다는 일은 율법에서 정한 그 이상의 자원함을 보여줍니다.
영화 “밀양”에서 꼬집은 것이 무엇인 줄 아시나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사람에게 보상하지 않는 그 신앙질,,입니다.
이는 비성경적인 회개와 믿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먼저 사람에게도 피해 보상을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도 등장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의 용서가 없습니다.
구하지 않으니 없는 것인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진짜 신앙은 아닙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요?
속으로 “나 구원 받았어” 와 바리새인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여긴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하나님을 인식하고, 구원을 사모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특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이 뿌리가 되기에 돈에 대한 태도는
회개의 열매로 결정될 수 있습니다.
이미 성령님이 새 성품을 주셨고 또 그 성품 안에서 새 의지력을 발휘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못 박힌 강도나 우리나 실제는 ‘그냥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삶의 모양은 다릅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가요?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보십시오. 강도의 말들을,
눅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리스도를 믿노라 했지만 주님을 찬양이나 순종 보다는 비방했습니다.
반면 낙원에 들어갈 이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없었지만 그리스도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23:40~42)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 하니
우리는 후자의 경우가 되어야 합니다.
자칫 믿는다면서 전자가 되기 쉽습니다.
후자는 하나님인식이 있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심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인식도 있었습니다.
전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무가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처형 받는 속에서도 행동했던 것입니다.
3)우리들
십자가 처형 전의 강도들은 예수님을 듣거나 보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고 삶은 강도질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를까요? 그것도 많이?
지금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은혜와 믿음이 이런 역사기록까지 추가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누구에게 강도들과 우리,, 누구에게 은혜가 더 크게 임한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면 준비되었나요?
우리의 고백은 어떨까요? 태도는 어떨까요?
비방한 강도처럼 “구원하소서” 할까요?
아님 꾸짖은 강도처럼“나를 생각하소서” 할까요?
병원 다녀오는 길에 장모님께 물어 봤습니다.
"제일 아쉬운 것이 무엇인가요?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믿음생활 잘하고 많이 나누어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들은 태생적으로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태어나서 결례도 행했을 것이고, 강도질하면서 안식일도 준수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두려운 마음에 금식
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떳떳하지 못해도 죄가 사함 받을까 하여 혹은 로또가 될까? 하여 십일조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거리로 나와 민주화운동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운동이 끝난 후 사회로 복귀했으니 사회전반에 민주주의는 성숙하게 자
리 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가요?
참 빛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 만큼 세상은 밝아야 하는데 그런가요?
다 실천하지 않아서입니다.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머리나 마음만이 아닌 손과 발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1년을 살면 365일, 100년이면 36500일이 됩니다.
길어도 짧습니다.
결론) 좀 되돌아보시고 주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주님 나를 생각하는 은혜에 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 인격자체가 브랜드입니다.
거기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명품이 되어야 합니다.
왜 명품을 선호할까요?
왜 명품이 비쌀까요? 브랜드 값이고, 좋은 상품이고, 세계인으로 신뢰받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았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부터, 내 사업장에서부터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회개한 사람들이고 주의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기에 범사에서 열매가 나타나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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