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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락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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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8-11-04 15:49 조회 50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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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살기위해 먹는 시대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 먹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대는 식도락이 발달된 것인데 먹방이 이를 증명합니다.

먹방이 얼마나 많은지 현시대의 콘텐츠와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1) 탐식

탐식은 비성경적인 생활의 단면입니다.

이런 때에 주님에 대한 불신이 증가한 일,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과 성경의 교훈을 진부하게 여기고 대신 붙잡은 다른 교훈이 있다면

그중 맛 재미에 매료된 것, 분명 할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의 즐김이 식도락인데 좋은 듯해도 성도는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된다면 사람은 우습게 되고,

신앙은 잘 먹고 잘사는 일이 되어 자칫 땅의 일과 지체의 소욕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먹고 마시는 일이 자연스러워도 음식은 적당량이면 되고 식도락도 끼니에 국한되면 되는데,

그 이상을 탐닉하면 어떨까요? 과잉공급이 문제가 되어 비만과 각종 성인병을 일으켜 개인과 사회적 부담이 됩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어떤가요? 성인병 치료비는 어떨까요?

국가와 개인의 경제와 시간의 손실은 어떨까요?

그래서 탐닉한다면 죄가 됩니다.

입과 배의 포만감과 또 외식이 주는 편리함이 죄가 되어서야 되겠나요?

 

경건은 여러모로 유익한데 매사의 절제도 됩니다.

식도락의 절제, 탐식을 끊고 건강함과 단정함으로 인도하는 줄 믿습니다.

 

2) 음식

율법에 의한 구별이 음식에도 있었습니다.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으로 나누었습니다.

부정한 음식이란 대체로 고단백질이나 고지방군 음식이었기에 부패가 쉽고,

자칫 건강에 나빠 하나님은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지금도 이단들은 금할 음식을 있다지만 성도들은 이제 자유롭습니다.

딤전4:3~4)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

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다만 이 자유가 믿음 약한 자들에게 시험을 제공하지 않기를 바라면 됩니다.

즉 시장에서 파는 음식은 다 먹되 누가 제사음식이라고 하면 삼가 하면 됩니다.

이 역시 음식이 부정해서가 아니라 제물이라고 귀뜸해준 그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달라서 나의 자유가 나를 바라본 성도의 믿음을 넘어지게 한다면 그 역시 죄가 된다는 교훈입니다.

 

성경에는 음식 때문에 스스로 망한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요? 기억하시나요?

히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

라

 

에서는 음식 먹다 체한 것도 아니고 못 먹어 죽은 것도 아닙니다.

대단한 음식도 아니고 많은 음식도 아닌 고작 한 그릇의 팥죽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망령된 자” 라고 했고

그런 일을 “두려워하라” 했으니 거울삼아야 합니다.

“망령된 자” 국어사전의미로는 정신나간자고,

신앙적의미로는 하나님을 떠난, 허망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최근 국감장에서 한 의원이 피감 단체의 단체장을 “듣보잡” 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지명 받은 단체장은 “내가 잡놈이냐”며 발끈하여 이의를 단 것입니다.

국감장에서 감사의원이 단체장의 행위가 아닌 인격에 이런 말을 한 것은 인격모독이 되고 명예훼손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좀 다릅니다.

에서의 행위를 근거해서 지적한 것입니다.

에서의 가치관이 문제가 된 것인데 믿음이 아닌 당장의 팥죽 한 그릇 때문에 미래의 복이 되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으니

“망령된 자” 맞습니다.

 

음식 때문에, 당장 때문에, 장자권과 미래를 잃어야 했으니,,어떨까요?

훗날에 그가 정신을 차린 후 되돌리려 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에서가 현대에도 많다면 어떨까요?

에서의 문제는 음식은 사랑하고 하나님은 불신해서 생겼습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요?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랑할 때는 콩깍지가 씌였다 할까요?

이처럼 상대에게 올인하며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셨습니다.

따지지 않고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이나 해질 녁에 들어온 일꾼이나 똑같이 품값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극치가 가롯유다에게도 등장하는데,

주님은 가롯유다가 곧 배반할 것도 아시고 잡히시기 전날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팥죽을 샀으니 음식사랑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반면 믿음은 무엇인가요? 역시 전적으로 신뢰하는 일입니다.

조건부는 믿음이 아니고 계약입니다.

아는 분의 회사에서 돈사고가 났답니다.

한 직원이 여러 직원들의 돈을 월12% 이자를 준다며 빌린 것입니다.

직원들은 이자 받는 재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조달해서 빌려주었다가 떼였으니

돈사랑 한 것이고 사람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주님에게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큰사랑은 요구하면서 좋은 믿음은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에서가 됩니다.

 

부자 청년이 주님을 따른다고 나섰으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너를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청년은 근심하

며 주를 떠나갔습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으면 어땠을까요? 주님은 청년의 삶을 책임져 주셨을 것입니다.

 

임계점을 아시나요? 물은 100도에서 끓습니다.

로켓트는 대기권을 뚫는 일이 자신을 불태우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은 자신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탐식하는 일은 자기사랑과 자기 믿음의 단면이 됩니다.

 

“두려워하라” 마음인가요? 생각인가요?

흔히 마음은 가슴에 있고 생각은 머리에 있다고 믿습니다.

또 어떤 철학자는 마음의 느낌도 실제는 뇌 작용인만큼 머리에서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머리도 가슴도 아닌 마음 둔 그곳에 마음이 있는 곳, 즉 머무는 곳이 됩니다.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이 마음의 변화를 주는 자극은 생각입니다.

 

에서를 보고 생각하십시오.

믿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을 최대한 밝히지 않아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먹어야합니다만 그 이상이라면,

먹는 것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 됩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 영광이고 나라입니다.

그래서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고 고생이 수반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고난을 종종 사용하십니다.

히12:10~11) ~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

를 맺나니

 

결론) 이 효과를 단단히 본 사람이 다윗입니다.

왕된 비결이기도 합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복이지만 세상관점이고 성도의 복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더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집중한다면 이미 그는 여기서 상급을 받은 것이 될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을 찾아 합독합시다.

고전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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