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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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신문의 큰제목들입니다.
미션라이프에서는 ‘은퇴 목회자들의 사랑방’ 경은교회, 끝내 문 닫아,
다른 신문의 사회면에서는 “사랑마저 쪼그라듭니다.”
사랑의 열매 모금액 작년 89% 수준 구세군 자선냄비도 37% 줄어
또 이슈란에는 “나이든 부모, 가족이 모셔야 ”27%,,10년 전 41%에서 대폭 감소
부모부양, 사회도 책임져야 48%
이러한 때에 주님이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신다면 어떨까요?
1) 자비를 베푼 자
강도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냐 며 주님이 질문하셨고 제자들이 답을 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흔히 "곳간에서 인심난다" 고 합니다.
요즘의 경우는 곳간이 말라서 인심이 사납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곳간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는 아닐까요?
우리는 6,25를 겪었습니다.
부산이란 항구도시에 반도전체 인구가 몰려 살아야 했었습니다.
공동묘지위에 판잣집을 짓고 다리 밑에 거적때기를 걸치고 살았습니다.
전쟁고아들은 거지였습니다.
국가나 개인의 곳간은 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더불어 살았고 마침내 이겨냈습니다.
약하디 약한 거지들도 살아났습니다.
풍성한 곳간 보다는 더 풍성한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비한 국가들의 원조가 있었고
거지들에게 한 숟가락 죽을 나눈 피난민들과 부산이란 기득권을 나눈 부산의 자비 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민가고 싶어 하는 제일국가가 캐나다라지만,
대한민국은 과거 원조했던 국가들이 되레 이민 오고 싶어 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잃었고 곡간 탓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사회현상을 보십시오.
아니 여지껏 그랬지만 대한민국은 시위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노동단체, 유치원단체, 택시기사, 대학강사단체, 외국인 노동자단체, 심지어는 국회의원들까지 시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곳간 지키겠다는 투쟁입니다.
그러나 착각하는데 민주주의는 투쟁이나 자기 밥그릇 지키는 일부터가 아닌,
내 밥 나누는 자비한 일이며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느냐” 하시지 않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던 것입니다.
2) 이와 같이 하라
외국인 노동자가 218만 명이 되는 시대가 되었고 우리 동포인 조선족은 80만 명이 넘습니다.
구로구에 밀집되어 사는데 노숙자가 1000명이랍니다.
합법적으로 들어왔기에 작은 주사나 시비로는 추방을 못한답니다.
그런데 이들을 정부도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의 교회들도 영세해서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이 노숙인들은 구역경계가 심해 영등포로 나가지도 못합니다.
가까운 장로님과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들 중 몇 명 데려가 교대로 교회가 좀 보듬어라 했더니 “못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말씀이 있었습니다.
약2:3~4)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
는 것이 아니냐
우리 신앙은 믿어야 할 바가 있고 행해야 할 바가 있습니다.
옛 유대인들은 믿어야 할 바를 믿지 못하고 율법을 행하다가 버림을 당했다면
현대기독인들은 행할 바를 행하지 않으므로 버림을 당할 듯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 이란 주님이 중심되고 주님이 영광 되는 모든 일들 아닌가요?
지난 주간에 연길을 다녀왔는데 만감이 교체되었습니다.
조선족사회가 텅 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의 간부와도 이런 일들을 얘기했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습니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굶고 탈북민들이 수도 없이 넘어 왔을 때,
농촌교회와 성도들은 그들을 맞이했었습니다.
지금은 그곳 농촌교회들이 피폐하고 그 사회가 줄어들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때에 저들을 사용하셨다 고 믿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으로 이주가 시작된 후 수입이 늘면서 인심은 나빠졌고 또 나빠진 만큼 탈북민들도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치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완전하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은 최선책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면 좋으련만 대체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칠했기에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가 되고 결국
은 양육강식이 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신앙은 어떨까요? 서기관의 신앙은 어떨까요?
신앙지도자들이었지만 이론적인 신앙이었나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에 강도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회개하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의 때를 사모하며 기도하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대접도 받지 못했던 사마리아인은 팔 걷어 붙였습니다.
교회라면 어떤 교회에 등록하시겠나요? 어떤 교회가 많아야 할까요?
목사님이라면 누굴 존경하겠나요? 여러분의 목사님이 어떠시길 바라나요?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어떤가요?
사랑하는 애인에게 청혼을 하러 가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가다가 애인의 집이 보이자 청년은 뛰었습니다.
그러나 애인의 집은 닫혔고 기척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애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당신이 우리 집에 오던 날 나도 창문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뛰어오면서 연약한 할머니를 밀쳤고 그 할머니가 쓰러졌는데도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할머니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의 사랑의 진심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요?
이 청년은 세계적인 수필가 영국의 찰스 램입니다.
그는 사랑을 잃었지만 이 실수를 통해서 귀한 가치를 배웠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고백하면서 약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나라는 정금만 있고 생명수만 흐르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나라인데 그 비결은 사자가 어린양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사자가 어린 양을 잡아먹으면 사자도 나중에는 굶어 멸종되게 될 것입니다.
3) 너도
성도의 자비는 상대방을 위한 선한 행동이지만,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직접이든 간접이든 전도에 활용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많은 구별이 있고 보이지 않는 선도 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은, 유대인들은 너무 분명한 구별과 선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경계를 무너트리셨습니다.
성도도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선한 일을 통하여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만큼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요? 주변을 보세요.
그리고 자신을 좀 보세요.
그리스도인으로 행할 바는 행하지 않고 이미 무너진 것들을 붙들고 믿는다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장로교냐? 성결교냐? 장로교면 통합이냐 합동이냐 성결교면 기성이냐? 예성이냐?
아까도 언급했지만 보수주의냐? 자유주의냐? 신앙은 복음적이고 개혁적이면 됩니다.
그리고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이 되면 손해 보는 듯해도 남게 되어 더 좋습니다.
결론) 본문에서의 "너도" 는 누군가요?
율법사이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주님께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한 똑똑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피곤하고,
가슴이 따뜻하고 손발이 부지런한 사람이 많아야 감동이 있습니다.
주를 믿나요? 그렇다면 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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