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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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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8-12-23 22:26 조회 490회 댓글 0건

본문

구약의 역사는 괴로운 역사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진노하셨고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벌을 피해 도망치는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말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니 교만한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그러나 이렇게 끝이 아니라 신선한 바람과 서광이 비추는 약속으로 끝났습니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

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1) 약속

사실 이런 약속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모든 시간 속에 면면히 증명되었습니다.

이 모든 약속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요? 주님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 약속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그러나 당대의 사람들은 막연했을 것이고,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의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쳤을 것입니다.

무려 400년의 세월동안 어떤 말씀도 어떤 징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그 때를 암흑기라 했을까요?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더라도 꼭 성취되지만 세월만큼은 지금의 세월과는 닮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이해 혹은 하나님의 믿음에 있어서 꼭 바꾸어야할 것이 있다면 시간개념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지배를 받고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 하루 혹은 한 달 또는 1년으로 셈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

이기에 우리 시간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간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시간이 가는 세월, 우리 시간개념인데 시계나 달력이 필요하다면

섭리가 이루워지는 때, 하나님의 시간개념인데 말씀과 역사가 필요합니다.

오늘이 며칠이고 지금은 몇시인가요? 미국에서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시간은 무슨 때인가요?

그래서 계시록을 보면 같은 날을 세는데도 상황 따라 달랐습니다.

세상을 의미하는 광야에서의 날을 셀 때는 1260일 동안 이라 했고,

섭리를 상징적으로 셀 때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했습니다.

사람의 날과 하나님의 날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의 시계에 우리의 시계를 맞추고 시간표를 보는 일이 됩니다.

 

2) 동방에서부터

지구는 둥글어도 해는 동방에서 떠오릅니다.

우리의 동쪽은 태평양건너편이고 실제 이스라엘은 서방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동방은 예루살렘이 맞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간 것이 그 증거입니다.

동방에서 낯선 별의 이동과 빛을 감지해서였습니다.

가서 보니 예루살렘이었고 박사들은 왕궁부터 노크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주님이 재림하실 터인데 별이 아닌 천재지변과 사나운 인심이 현상으로 나타난답니다.

그것도 동방만이 아닌 범지구적으로,

 

여하한 주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단순한 질병의 치료가 아니라 근본적인 죄의 형벌에서의 치료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평화로 만드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깝게 하셨고

무너진 성전신앙을 성령중심의 신앙으로 재건하셨습니다.

엡2:16)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치료의 광선은 십자가의 대속이셨습니다.

오셔서 마귀의 일과 죄를 멸하셨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일이지만 모두에게가 아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주신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 치료를 받은 이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3) 뛰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리라”

이런 송아지가 뛰는 모습을 보았나요?

놀라서 뛰든 좋아서 뛰든 같은 모습인데

고삐 없는 송아지가 뛰는,, 억제가 안 된 모습입니다.

 

주님을 만난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백성들에게서,

또 광복을 맞이한 우리 선배들에게서,

금번 축구에서 우승한 베트남에게서 이 모습을 엿볼수가 있습니다.

광기하고는 다른, 두려움과 불안과는 전혀 다른 환희의 몸짓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인식했다가 면책된 자유의 기쁨인 것입니다.

세상이 현재 누리고 있는 성탄의 기쁨은 어떤가요?

속물적인 것인 것이고 육체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배설의 기쁨만도 못한 유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에서 온 치료의 기쁨은 자유를 동반했기에 세상이 주는 것과는 본질 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죄 사함의 면책, 지옥형벌에서의 구원, 감정적이지만 마르지 않는 감정이고

시간이 갈수록 물댄 동산 같고 샘이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기쁨이기에 감사도 충만합니다.

 

사도바울은 세상환희와 구별하기위해서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술 취함입니다.

깨면 숙취가 남는, 육체의 국한된 일시적 흥청일 뿐입니다.

그러나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는 기쁨은 성령충만이기에 결코 인위적일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화와 불안과 후회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기도합니다.

대단하고 놀라운 힘입니다.

주님 오시기 전의 구약과 오신후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교회의 진정한 위상입니다.

 

여기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론 의로운 해가 분명 떠올랐고 치료하는 광선도 발했는데

개인적으로 아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들은 슬프게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여전히 남겨져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 먹어라”가 복음이고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구세주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공통된 문제는 무엇인가요? 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모든 사람이 들을 만한 복음, 하나님나라 복음은 무엇

인가요?

치료의 광선으로 하나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 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러므로 성탄은 “놀자” “즐기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심에 평화를 얻은 이들은 감사가 있어야 됩니다.

 

영국경매시장에 세계최초의 성탄카드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앨버트박물관의 초대관장인 헨리 콜이 친구들에게 돌린 것입니다.

이 카드의 글과 그림을 통해 당시 성탄을 맞이한 1800년대 신앙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한 성탄과 새해를 기원합니다.” 이 글귀로 보아 서로를 축복하는 시즌이었습니다.

또 그림에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성탄절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중앙에는 말씀이 적힌 탁자에 둘러앉아 온 가족이 행복하게 식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추위에 더는 엄마와 아들에게 담요를 건네주는 모습,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성한 식사를 차려주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결론) 성탄의 주인공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만방에 알리는 즐거운 축제가 되도록 세상문화에 마음과 눈을 빼앗기지 말고

경배와 선행과 감사로 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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