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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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이 얘기를 했답니다.
해가 먼저 말하기를 “내가 보니 지구의 사람들은 온종일 일만 하네”
이젠 달이 응수하기를 “웬걸,,내가 보니 그 사람들은 잠만 자던데,,” 관점의 차이입니다.
간판이 많아도 다 보지 않고 관심 있는 간판만 보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아3: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1)민주주의
선교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요? 주님 부탁하신 일입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얼마나 훌륭했던가요?
그런데 선교여행을 하다가 둘이 심하게 다투고 헤어져야 했었습니다.
관점이 달라서였습니다.
다양한 관점을 표현할 수 있음이 민주주의입니다.
시끄럽고 요란해도 이 과정을 거쳐 한 뜻만 이루면 다양함으로 큰 발전을 이룩합니다.
이미 우리 속에 다양함의 민주주의가 생활화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맆스틱도 너무 다양하지 않나요?
빨간, 분홍, 커피색 등의 단순색이었는데 지금은 수 십 가지가 되고, 염색약도 그렇습니다.
아픈 것도 그냥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싸하게 아프고, 콕콕 쑤시게 아프고, 우리하게 아프고, 뼛속 깊이 아프고,,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며느리도 시댁을 향해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직장의 서열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전체주의 문화가 지배적이라서 여러 분야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신기한 게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은 유행을 모를 정도로 다양성이 있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는 획일적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식당에서는 김치찌개 아니면 된장찌개, 순대국이나 뼈해장국, 삼겹살 혹은 돼지갈비, 짬뽕이나 짜장면, 여성들의 파마도
비슷하고,, 남성들의 양복도 일률적이고,
다양한 민주주의가 좋습니다.
인권자유평등의 보장,,그러다 보니 권위가 실종되고 기존 질서가 흔들리는 판국입니다.
인천 궤어 축제에서 한 목사가 저들을 위해 축복했답니다.
축복자는 소수자에 대한 사랑이 교회의 본질이고
성직자의 양심의 자유라며 축복했다는데 감리교는 재판에 회부시켰습니다.
회개를 촉구할 자들에게 축복한,, 기존의 질서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미국연합장로교가 그런 경우였다가 결국 교단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점, 그 시작은 마음이지만 눈을 거쳐 발걸음에서 마칩니다.
우리 모두는 발전하는 관점의 차이로 국가관이나 역사관이나 경제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경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최소한도 같아야 합니다.
초록은 최소한 동색이어야지 전혀 다른 회색이라면 성도가 아니고
성경적 관점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죄의 구별은 개인의 느낌이나 시대상이 아니라 하나님말씀에 의한 구별이며,
죄에 필요한 것은 사탕 같은 축복이 아니라 언제나 쓴 약 같은 회개여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이고 거룩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한마음, 한뜻, 한성령, 한성경, 한믿음인 것입니다.
엡4:3~6)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
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가운데 계시도다
2) 선교여행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었고,
선교에 하나된 팀원들이 되어 사도바울 일행은 3차 선교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상해 봅시다,
눈물의 작별이 있던 에베소를 떠나 돕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드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섬들을 그냥 스치고 말았는데 왜 이런 섬들을 스치기만 했을까요?
“고스”에는 의사들이 선언하는 히포크라테스라는 의인이 세운,,
당대에는 최고로 좋은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로드”에는 수사학 학교가 있었고, “바다라“에는 번창한 무역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성회인도차 미국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LA에서는 라스베가스와 멕시코를 둘러보라했었지만 사양했었습니다.
다만 작은아버지를 찾아뵈었고 사촌형을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그 집을 찾았을 뿐입니다.
뉴욕에서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라든지 자유의 여신상은 얼씬도 안 했습니다.
뉴저지에 와서는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동네에서 묵었지만 관심 없었습니다.
중국은 셀 수 없을 다녔지만 북경은 두 번이고 만리장성과 이화원은 안 갔기에 모릅니다.
주로 동북성을, 특히 연변과 두만강변을 다녔는데 이유를 아시겠나요?
여행은 목적에 맞는 도시나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일행역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선교가 목적이었기에 선교에 관계없는 곳이라면 상관없는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관심이 다른 만큼 관점도 다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엄중한 진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미래희망과 준비로 충만한 청년 때는 지식으로 알뿐 실감나지 않습니다.
늙어 몸이 아프고 지인들이 떠나는 노년 때에는 마음이 죽음에 머물고 필멸성이 실감됩니다.
자신이 아직은 죽지 않는다와 곧 죽는다와 삶의 모양이 다른 것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모든 이들을 다 아시지만,,
관심 있게 보시며 찾으시고 대우하시는 기관들과 사람들이 있다는 진실입니다.
주 예수와 관계가 있는 자만이 하나님관심의 대상이 되어,,
그를 보시며, 붙드시며, 찾으시며, 사랑하십니다.
인생의 성공은 여기에다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시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내가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찾으신 바가 되어야 합니다.
3)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
요한계시록 초반에는 초대교회 7곳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머리가 되신 주님의 기록이고, 책망이며, 칭찬이기에 엄위하심이 있습니다.
그중 샤데 교회가 나오는데 “계3:1) 샤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
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분명한 책망이지만 이제는 칭찬이 나옵니다.
계3:4) 그러나 샤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연고라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곧 주님이 찾으신 자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관들이 있었을까요? 정부기관,, 은행, 학교 등,,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왕도, 귀인도, 부자도, 지식인도, 미남미인도, 똑똑한 사람도 다 있었을 것입니다만
주님은 오직 교회들을 관심 있게 보셨고,,
그 속에서 신앙절개를 지킨,, 세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킨 소수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와 같은 성도였을 것입니다.
웅크리고만 있어 옷을 더럽히지 않은 신앙이 아니라 제국의 박해 속에서,,극심한 가난 속에서,,“죽으면 살리라” 하는 믿음
으로 주와 거룩한 동행을 한 올곧은 성도였던 것만은 분명하지 않나요?
주님은 죽었으나 다시 사셨고,
아니 계신 듯해도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 살피시며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관점은 흔들림이 없이 정확하고 분명한가요?
그렇다면 무엇인가요? 거기에 대한 여러분의 모습은 어느 정도인가요?
그러나 주님의 관점과 반응과 태도는 영원토록 확실합니다.
이를 기뻐하며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관점이 주님께 있을 때 주님도 나를 후대하십니다.
마10:30~33) 너희에게는 머리털가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결론) 관점의 차이로 죽고 사는 일은 허다합니다.
우리의 관점은 주님께 모아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고, 주님과의 동행이고, 세상 것에 대하여 스치는 것이고, 옷을 더럽히지 않는 거룩이고, 마침
내 흰옷을 입고 다니는 승리와 영광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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