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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과 나그네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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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08-02 18:33 조회 39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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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의 특징을 아시나요?

임시적인 생활이기에 간편 생활을 하고,

떠나오거나 거주하는 고장보다 본향을 더 흠모하는 생활자들입니다.

 

1) 코로나의 문제

세상은 지금껏 고비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 지금의 발전을 이룩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인도요,

둘째는 동물과 다른 생각하는 존재인 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디시피 인류역사는 종이발명으로 종교개혁의 전단지를 뿌렸고,

증기의 개발로 산업화를 이루고 컴퓨터로 세계화를 이룩했지만

종이필요가 급증하므로 숲을 벌목했고, 산업화로 오폐수를 방출했고,

컴퓨터로 세계화를 이룩했으나 가공할 만한 위력의 병기와 미래의 무서운 원수일 알파고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결과 어떤 일이 발생하나요?

며칠 전의 신문 사회면의 큰제목이었습니다.

“강원도서 감귤 재배,, 온난화의 경고”,,

“사막 메뚜기 떼의 역습,, 기후변화가 만든 재앙”

비슷하게는 긴 장마와 폭우,, 수돗물에서의 유충 발견도 포함됩니다.

그 중 코로나도 한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출 것 같질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성경은 경고하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이하는 이런 전쟁, 기근, 하늘의 변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부터 화, 화로다 하며 탄식했고,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않고 고통에 매이는 판국이 된다

니,, 두렵습니다.

이 시절이 지난 후 비로서 새로운 나라인 곧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실제적으로 임합니다.

계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를 막을 방도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고 당하기보다는 경고하심의 목적에 따라 알고 나름의 대비를 하는 일이 현명하며 계시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

다.

이게 믿음이고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과학은 더 발달하고, 상업주의역시 더 소비를 부추 켜서 더 많은 온난화와 생태계 파괴를 이루며,, 이념은 극대화되

어 전쟁도 있을 것입니다.

불과 수십 년만의 생활과 전혀 다른 양상을 갖고 있는데,, 어린아이들의 동심이 없어졌고 놀이터는 가상의 게임 방으로 대

체되어 버렸습니다.

 

이 모든 궁국에는 바벨탑을 건설하고, 흩어짐을 면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자는 사람중심의 성장주의가 원인이었습니

다.

그러나 그 탑을 하나님께서 비웃시면서 허무셨고,, 사람들을 흩으셨듯이,,

그 의미는 여전합니다.

 

2) 아브라함과 이삭

그런데 이들 속에서 한 사람을 끄집어 새 땅으로 나가도록 명령하셨고,,

인도하셨는데 곧 아브라함입니다.

이는 좀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중심이었습니다.

그는 높아지기 보다는 창대하리라 하심을 기뻐했고, 자기의 이름을 지면에 내기 보다는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며 경배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고향 보다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이방인과 나그네처럼 간소하게,,,자연친화적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바벨론은 성장주의적 문화요, 문명중심이었다면,,

아브라함은 질서주의적 문화요, 믿음중심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위엄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성도의 삶이 여기에 있습니다.

끝도 없는 물질문명에 붙잡히지 말고 하나님의 권위가 최고위에 있는 그 질서주의를 회복해야 합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나 생태계학자들은 계속 주장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코로나로 뉴노멀시대가 왔다.

맞습니다.

코로나는 이기거나 달리 변종되어도 코로나 탓에 새롭게 전환되는 시대가 온 것은 분명합니다.

종이발명이나 종교개혁이나 컴퓨터의 발명과 보급처럼,, 코로나 전과 후는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믿고 살아야 하나요?

몸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 편리와 소비를 추구하는 그 삶이 아니요,

좀 부족하고 불편해도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 하는 단순 삶과 자연과 생태계 보호에 함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선 성장 선 소비,, 후 질서 후 안전이 아닌 선 질서 선 안전이어야 합니다.

가끔은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일이 있습니다.

별 헤었던 밤을,,시원한 우물을 벌컥벌컥 마셨던 그때를,,

그때는 동경심과 무한한 상상의 동심이 있었고, 맹꽁이도 울고, 사람들 마음에도 “하나님 두려움이”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내 평생소원 이것 뿐 서울에 아파트 사는 것”,, 법은 많아도 질서가 없어 졌고,,

결국 사람도 밟히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오직 돈 좀 달라” 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가 실종된 상태인데,,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고 내가 순종해야 할 대상인데,, 너 나할 것 없이 “도와 주옵소서”하여 하나님권위를 실추시켰습니

다.

 

미국 씨에틀 시는 미국 인디안추장의 이름입니다.

예수 믿기에 박해 받아 피난 온 백인들에게 땅 주고 식품주어 돌봐주었던 그 백인들인데,, 언제가 부터 그 백인들이 총 들

고 쳐들어 와서 약탈하고,, 개발한다며 자신들을 내쫓고,, 백인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일에 연설했던 추장이었습니다.

당시 무슨 글이 있었고 무슨 기록이 있었겠나요? 그러나 전해진 내용을 읽으면 가슴을 울립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특히 신앙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자연과 사람은 하나입니다”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추가로 스웨덴의 16세 환경운동가 크레타툰베리의 유엔연설도 들어야 합니다.

“미래 세대의 삶을 훔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미래는 후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게서부터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나그네,,이삭과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11:15~16)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편한 문명과 풍성한 삶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는 만큼 늘 따집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세상기준이면 신앙은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 보다는 천국이어야 하고 물질문명의 풍요보다는 궁핍해도 주 동행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이런 가늠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지금,,우리는 이방인과 나그네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캠핑카를 타고 캠핑을 가는 시대이고, 도시의 현대주택에 살아도 휴지 한 장, 세제 한 통, 물수건, 알루미늄 호일, 플라스틱

용기 들을 생각 있게 사용하고 등,


믿음은 교회에서만이 아닙니다.

실제적 생활에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사는 조건에서만 찾으면 안 되고 죽는 조건에서도 활용해야 진짜입니다.

히11:35) ~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결론) 하나님의 예비한 성은 누구나의 성이 아닙니다.

히11;6)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한 성,,분명 천국을 의미하지만 오늘의 건강한 가정, 사회, 국가도 되고 미래의 국가도 됩니다.

이 성을 사모하십시오.

이상이 아닌 이방인과 나그네적 삶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몽골 유목민들의 집은 게르입니다.

그들의 집은 부서져도,, 그들이 머문 곳에는 쓰레기가 없고 대신 빛나는 별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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