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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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행복하신가요?
노인이 어느 날 길에서 달려가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궁금해서 물었겠지요? “왜 그렇게 달려가나?”
남자는 “행운을 잡으려고요”하면서 계속 뛰어갔습니다.
다시 노인이 응수해주었습니다.
“자네의 행운이 자네를 붙잡으려고 뛰쫓고 있는데 자네는 너무 빨리 뛰고 있어”
1) 행복찾기
여기서 사람들의 자화상을 볼 수 있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행복을 찾지만 행운은커녕 행복도 없습니다.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어 탈진하며 과로사까지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철학자들은 여러 방책을 내놓았습니다.
“느리게 살아라”- 느리게 산다는 의미(프랑스사회학자 쌍소)
또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데서 온다”-
느리게 사는 삶(파스칼)
어떤가요? 느린 나무늘보가 제일 행복할 텐데 그렇지 않으니 틀리고,
총알배송으로 택배기사가 과로사하니 어느 주문자는 빠름 보다 불편함을 택한다고 했으니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하려면 행복의 정의를 다시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행복은 상태를 말합니다.
배부름의 상태, 소유함의 상태, 일종의 기쁨의 감정적인 상태입니다.
그래서 수고스러운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적인 기쁨만을 얻고자 합니다.
이는 마귀가 주는 헛 행복인데 그 후에는 허무가 옵니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기쁨을 찾다가 결국 중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어떨까요? 관계였습니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
하리라
주님의 행복은 하나님아버지와 관계성,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했던 그 모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행복을 제자들에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아무리 멋진 곳도 서너 번 가면 시쿤 둥 하고, 놀이나 음식도,,나중에는 또 “그거야?” 합니다.
여기에는 베푼 이의 보람도 받는 이의 고마움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사랑의 관계는 지속성이 있는 만큼,, 사랑하는 이는 보람을,, 받는 이는 고마워서 행복합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빛나고,, 사랑을 받으면 얼굴이 빛나는 이치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기쁨이었고 사랑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2)성도의 행복
그러므로 성도의 행복기준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사함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죄사함은 죽어서도 심판이 면책되고 죽어서도 천국에서 눈뜬다는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곳에 있을 거야” 혹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덕담이고 소망이지만,,
그 근거는 아무에도 없는 그냥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확실합니다.
이 보장이 얼마나 든든한지요?
예수님의 관계,,나아가 하나님아버지와 화목한 관계를 확신합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성령이 보혜사로서 기쁨을 주십니다.
이 때의 기쁨은 편안이 아닌 평안입니다.
사도바울일행은 전도하다 잡혀서 매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혔었습니다.
그에게 편안은 없었지만 평안이 넘치게 있었습니다.
찬송하지 않았나요? 그 소리를 주변사람들이 들을 정도였습니다.
베드로역시 감옥에서 곧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쇠사슬과 간수들에게 매여서도 깊이 잤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이었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기쁨을 앗아가는 근심이나 두려움은 행복의 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행복을 지키려고 부나 권세로 산성을 쌓고,, 종교라는 경호원을 두고,
보험이라는 보장에서 숨곤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죄책은 가시질 않기에 참 평안을 모릅니다.
미국 비버리힐즈 대저택에서 사는 일반인들의 삶을 보여 준 프로가 있습니다.
누구는 2자녀의 보모가 4명이고, 또 누구는 37개의 기업체를 운영하고, 누구는 수영장, 테니스장, 승마장까지 갖추었고, 누
구는 보석으로 치장했었지만 그들의 행복이 탁월하지 않았습니다.
부자임은 맞지만 행복자는 아니었습니다.
금번 별세한 재벌회장댁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둘째 아들은 어려서 잃고 막내딸은 유학지에서 자살했고 큰아들과 또 다른 딸은 이혼하고,,
그 집안은 결코 평안하질 않았으니 행복도 없었을 듯합니다.
잠25:27~28)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행복자로 만들어 주고 기쁨을 보장시켜줍니다.
여기에 두 가지가 절대적입니다.
첫째, 구세주를 믿느냐 하는 믿음, 믿어야 하며 그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독일의 본 휘퍼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습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나약한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앞에 스스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
둘째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사랑하면 행복하고 감사가 넘칩니다.
또 이 감사는 기쁨을 가져다주고 또 행복을 주는 선작용이 역사합니다.
옛날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했지만 이제는 “사랑 잃고 뇌 약간 고친다”입니다.
사랑이 묘약인데 미처 몰라서 무시했다가 인생전체를 잃곤 합니다.
3) 성도의 행복관
이제 성도의 행복관은 아주 달라야 합니다.
경쟁구도 속에서 애쓰는 것도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함이라는 논리에만 붙잡히지 말고,,
마음을 고쳐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부자 되길 힘쓰길 보다는 자족하며 주 안에 머물며 사랑하는 자로써,
감사하며 성령의 평안을구해야 됩니다.
두 눈을 잃은 한 소년거지가 굶고 매 맞으며 깡통을 차고 구걸을 했습니다.
원망과 좌절로 숱한 자살을 시도하다가 교회를 나가 감사와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구걸한 돈에서 새 돈을 골라 헌금을 드리곤 했습니다.
은혜가 임했습니다.
누군가의 주선으로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또 거기서 선교사와의 만남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꿈도 생겼습니다.
지금은 그 꿈을 이루고 사는데 약 4만 명이 넘는 맹인들에게 개안수술을 해주었습니다.
만약 그가 부자가 되려했다면 어쩌면 평생구걸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주 동행하시는 기쁨을 모릅니다.
유감되게 이런 기쁨을 모르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행복 추구하고 세상방식으로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도를 막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정권 말에는 대형사고가 많이 터지는데 특징이 무엇인가요? 권세 아니면 돈입니다.
행복은 권세 아니면 돈에서 온다고 믿고 따랐다가 패가망신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도는 그럴 수 없습니다.
결론) 성도는 언제나 예수님의 향기요 편지입니다.
성도의 얼굴에는 예수님얼굴처럼 하나님을 아는 빛을 두셨습니다.
성형수술이나 시술로 보다는 믿음과 성령내주하심으로 기쁨 충만하여 행복자로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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