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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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노래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노래처럼 세상은 언제나 이해하기 난해합니다.
사람의 일이라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이상한 세상
이 세상은 언제나 이상할 것입니다.
여기에 철학적 의구심은 당연하더라도 철학적 해법은 있을리가 만무입니다.
하박국선지자도 이상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합1: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듯한 현상들이 일어났는데,, 전통과 진리 보다 억지와 궤변이 판을 치고,, 다수라는 숫자가 하나님
의 뜻으로 둔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합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과 현상을 보는데,,
그 이면을 보는 안목과 속상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도둑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 말처럼,,
경건의 능력이 해이하면 할수록 부정과 긍정을 엇박자로 해석하곤 합니다.
긍정으로 볼 때는 부정으로 보며 “아니다” 하고,
“아니다”할 때는 긍정적으로 보아 “괜찮다” 하는 것입니다.
뒷바뀐 안목과 심정,, 이 역시 마귀의 궤계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이런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참선지자는 망함을 외쳤건만 왕에게 아부하는 거짓선지자들은 평안하다를 외쳤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한국교회도 자유롭지 못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장로대통령이 의장이고 목사국회의원이 기도로 출발했으나,,
그만 친정권이 되어 군사정권에 편승했던 오점이 있었습니다.
부정적 사회를 지나친 긍정으로 오인했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요?
정치에서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우려와 아픔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국민의식이 좋아야 정치와 시민의식도 개선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고민도 없고 아픔도 없고 오직 “좋습니다.” 만 한다면,,
믿음은 기초가 뽑히고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하박국선지자를 보십시오.
직접 전쟁과 시민운동과 정치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어찌하여” 하며 깨어 있으니,,
깬 기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마침내 응답을 얻었습니다.
합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이 응답 앞에서 참된 긍정의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2) 절망 속에서
민족에게 최악의 나쁜 상황은 무엇일까요? 전쟁입니다.
합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썪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우리는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IMF를 겪었고 지금은 코로나 시대입니다.
전쟁보다는 여하한 희망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믿음이 없으면 절망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선지자는 하나님께 받은 응답이 있었기에 전쟁이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가졌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 부족한지만 손꼽고 불평원망하거나 절망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들이 그렇다면 유감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하실까? 믿는 이들이 무엇하기를 바라실까?
사람은 무엇이든 아는 것만큼 행동하기에 “아는 것이 힘이다” 했습니다.
젊은 사자는 주리고 용사는 거꾸러질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삽니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고 산성이 되시기 때문인데 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꾸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꾸 배워가야 합니다.
이론의 지식만이 아닌 경험만이 아닌 이 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도가 붙잡아야 할 지식은 언제나 하나님 아닌가요?
이럴 때 언제 어디서나 희망이 있어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기쁨과 감사는 일란성쌍둥이 같아서 감사하면 기뻐하고 기뻐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조건이나 상황이 아닌 믿음으로의 성숙한 모습입니다.
합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최근 한 원로목사님이 미국 변호사였던 42세의 둘째 아들을 암으로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공산주의폭거들에게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목사님의 감사가 생각나 10가지 감사를 올
렸습니다.
여기에는 믿는 이유가 있습니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언제나 세상을 보면 이상하기에 신뢰할 수 없고 자칫 숨거나 피하고 싶은 일 투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들어 하늘을 지으신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주신 그 큰 사랑과 신실하심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힘이 되십니다.
특별히 19절의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를 믿어야 합니다.
타인의 높은 곳이 아닌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얼마나 희망적인가요?
3) 차별된 희망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조건이나 상황이 좋으면 기뻐합니다.
이런 때는 개도 춤을 추고 꼬리칩니다.
또 상대적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곤 합니다.
신발이 없어 불평하다가도 다리 없는 사람을 본 후 자신이 괜찮다고 여기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성도는 차별화된 존재이기에 조건이나 상황에서만 희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희망은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말대로 “주 안에서 사실 지금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해야 옳습니다.
선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합력하여 마침내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세상 뉴스는 암울하고 주변의 사람들은 울상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절망과 우울이 내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되레 성경을 읽거나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위엄과 믿음의 선진들의 훌륭한 신앙을 닮게 되며 희망을 노래하게 됩니다.
합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 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렇듯 차별화된 신앙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고 따라서 세상을 이기게 되는 줄 믿습니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기독교핍박을 피해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했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요? 정착 후에도 기후병으로 죽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먼저 예배당부터 지었고 다음에 학교를,, 나중에 집을 지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었음을 웅변 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동안 도와 준 원주민들과 함께 잔치를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1620 년경 보스턴지역에서 있었던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절망 중에서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노래했더니 과연 그런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미국은 이 터 위에 세워진 만큼 지금껏 크고도 강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과 신앙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승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시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1호선교사는 우리와 수교 전에 베트남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선교지를 개척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등에서 312교회개척, 병원 16, 중학교 1, 초등학교 2, 신학교개척설립,
그리고 6300여명의 언청이 무료수술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게 개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된 일인가요?
결론)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생각하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보며 희망을 생각하면 희망의 길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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