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명을 주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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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당에는 큰 글의 현수막을 붙였습니다.
“용서는 가장 큰 복수입니다”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용서는 구체적 사랑 중 으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복수가 아닌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 하라” 하셨는데 시적표현으로는 뭐라 할 수 있을까요?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1) 새 계명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라” 하셨으니 옛 계명도 있어야 합니다.
모세로 말미암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모세의 여러 가르침입니다.
계명은 법이고 규칙이고 질서이고 정의입니다.
혼자 살 때는 필요치 않고 더불어 살 때 절실히 필요합니다.
현대처럼 복잡하면 법도 많아야 합니다.
이런 법은 언제나 지역, 시대, 대상이 국한됩니다.
그래서 말이 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과 모세의 여러 가르침은 하나님의 의였지만,
그 법은 하나님백성된 표지였고, 완전한 법인만큼 죄인은 지킬 수 없는 법임을 깨닫고 구세주의 필요를 인식하라는 하심이
었습니다.
그러므로 옛 계명은 구세주인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지켜라” 대신 이제는 “주를 믿으라” 합니다.
옛 계명아래 오신 예수님은 그 계명을 완전지켜 하나님보시기에 완전한 의인이 되셨고,
주를 믿는 모든 죄인들에게 자신의 의를 전가시켜 의인화시킵니다.
이때 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의로운 법인 것과 그 법을 주신 하나님도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드러낸 줄 믿습니다.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그 법에 이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죄는 즉시로 수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수치를 아담과 하와는 가릴 줄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것이 상책인 줄 알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진정한 방식을 이루셨는데 대신 동물을 희생삼아 그 가죽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
우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방식은 영원합니다.
또 노아가 홍수 후에 술에 취하였을 때 자신의 하체를 드러낸 수치를 보였습니다.
한 아들은 수치를 밝혔지만 두 아들은 그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전자의 수치 가림은 하나님의 용서라면 후자는 사람들의 용서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수치의 가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의 값으로 따진다면,, 내 목숨 값입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하는 데는 인색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없고 사랑도 없는 속물인 까닭입니다.
흔히 사과하거나 사죄하면 용서한다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사랑은 이를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건부가 아닌 은혜부이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라
이제 새 계명은 주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주신 계명입니다.
그 최고는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미치게 됩니다.
현대는 증오와 복수가 너무 많습니다.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했는데,,
이러한 증오와 한이 너무 많아 이상기온이 난 것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왜 그런가요? 사랑 받지 못해서입니다.
왜 사랑이 없을까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아님, 믿음은 있으나 성령받지 못했으니 이론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어서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초급적인,, 받을 사랑이 아니라 고급적인 줄 사랑을 계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도 성숙하고 가정도 사회도 성숙해 집니다.
똑같은 이상적인 국가지만 사회주의와 하나님나라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사회주의는 자유 보단 평등을 앞세웁니다만 사랑이 없어 자칫 잔인만 있게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에 감시가 심한 게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속물보다 하나님가치를 구현하지만 사랑이 나부터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시발적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허다한 허물이 덮어지고 치유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정이 그래야 하고 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그 주변들이 광경을 목도하고 그 맛을 알아야 건강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무엇인가요? 그 어디나 천국입니다.
반대가 무엇인가요? 궁궐에서 다투는 아내와 살면 어디인가요? 곧 지옥인 것입니다.
가정은 시시비비를 가리면 안 됩니다.
교회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권하고 징계하는 권징은 있어도 비상약이어야지 상용약이 되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부자되길 보다는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3) 사랑의 구체성
사랑은, 전에도 말씀했지만 ‘동사’입니다.
그리고 그 특성은 ‘지금’이어야 하고 구체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
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
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
라
사람이 참 희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았다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서의 행복 보다는 남을 사랑해서 그가 행복한 그 모습을 보면
더 행복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 사랑이 여기서 비롯된 줄 믿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보다는 남을 향해 써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의 이룰 사랑은 동물적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적 사랑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무조건적 사랑이어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 뜻입니다.
세상이 사나워졌다는 현상을 많이 봅니다.
말세의 현상 중 하나인,,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우린 사랑 앞에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죽기 전에 용서 할 수 없다”
“지옥까지 가서라도 복수할 꺼야” 이런 말이 증거입니다.
요즘 차별반대법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아닙니다.
공무원들과 정무직이 다릅니다.
아시나요? 차이를,, 같은 정규직이라지만 공무원은 고시출신이고,
정무직은 비정규직출신으로써 법으로 전환 된 신분인데 갈등이 있습니다.
또 쇼셜 믹스도 있습니다.
민영아파트단지에 임대아파트를 함께 넣어 더불어 살도록 했지만 함께하기가 어렵습니다.
민영아파트는 개인소유라면 임대아파트는 국가소유입니다.
법은 함께하도록 정했지만 통념은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 보다는 사람이 성숙해야 하고 그 성숙은 지식이 아닌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역시 변화가 안 됩니다.
유전자와 습관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화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이 변화되길 바랍니다.
변화할 힘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중심이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지난주에 말씀했던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가질 때 예수님의 마음도 얻어 사랑의 힘이 발휘됩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그 충만은 큰사랑을 발휘합니다.
결론) 본문은 말씀합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죄는 사랑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말 것을 사랑하도록 변질시킨 타락의 원흉입니다.
옛 계명의 가치는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새 계명 역시 같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했으니 여기서 벗어나길 축복합니다.
사자와 어린 양이, 독사의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어도 함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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