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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벧에돔의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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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9-08-26 09:13 조회 49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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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자여인은 TV에 나와서 “돈은 생물이기에 돈을 귀하게 여기면 돈도 그 사람을 귀하게 대접한다 ” 했습니다.

농작물은 어떤가요?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자란다지요?

사람은 어떤가요? 옛날 푸줏간은 백정들의 업이었습니다.

한 양반이 고기를 사면서 “ 백정,, 돼지고기 한 근만 주라” 했습니다.

또 다른 양반은 “여보게 이 서방, 돼지고기 한 근만 주게나” 했습니다.

백정은 똑같이 고기를 썰어 주었는데 앞선 양반의 고기보다 나중양반의 고기가 더 좋았던지 앞선 양반은 불만을 제기했습

니다.

그러자 백성은 “앞선 고기는 백정이 썬 것이고 나중고기는 이 서방이 썬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어떨까요?

 

1) 하나님의 궤

구약의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임재의 상징물이며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담은 항아리, 십계명 돌비가 들어있었습니다.

옛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궤를 하나님처럼 여겼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도 메고 나가면 전쟁에서 이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지면서 이 하나님의 궤를 원수 불레셋에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불레셋은 이 빼앗은 궤를 자신들의 신인 다곤 신당에 쳐 박아 두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나요?

그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지는 등의 두려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불레셋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 궤를 이스라엘에게 되 보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그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되찾아 오는데

마차가 흔들리니 웃사가 그 궤를 잡다가 즉사했습니다.

그러나 이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소문난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궤지만 대상에 따라 화가 되고 복이 된 것입니다.

물론 불신앙 불레셋에게는 화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도 때론 화가 되고 복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우사에게는 화가 되었지만 오벧에돔 집에는 복이 되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요?

궤에 대한 지식, 믿음여부였습니다.

곧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고 믿음여부인 것입니다.

궤가 있었어도 실질적 무신론자들에게는 화가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현대 신앙에도 조명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은혜역시 한량없으시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로 여겨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길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높여주시고,

강함을 부어주시지만 멸시하면 오래 참으심도 한계가 있어 진노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 되시기때문입니다.하나님경외는 언제나 정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방법으로 섬겨야지 세상식이나 자기 식은 실질적 무신론이 됩니다.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땅에 절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랍시고 금상을 만들어 비는 일은 어떨까요? 아닙니다.

곧 주 예수를 하나님으로, 구세주로, 만유의 주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의 믿음입니다.

 

2)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보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섬깁니다.

물론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말씀입니다.

웃사가 죽은 것은 하나님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이동해야 옳고, 제사장이 아닌 다른 이가 만지면 즉사하도록 계시되었기 때문입니

다.

 

계시에 의한 믿음이 하나님을 뵙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믿음이,, 행함과 진실함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기본적으론 영접이고, 경배이고, 전도이고, 기도입니다.

영접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자체가 하나님께 마음을 연 행동입니다.

그리고 경배는 그분을 만유의 주로써의 인정이고, 전도는 자랑이며, 기도는 그분을 향한 마음의 집중입니다.

 

이 믿음이 좀 더 성장했다면,, 이제는 소망이 됩니다.

소망은 인내가 옵니다.

이 믿음의 소망은 극심한 고난과 마지막원수의 사망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최고인,,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배려, 긍휼, 자비, 양선, 친절 등입니다.

요1서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무엇이든 차이가 있듯이 신앙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만 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신앙은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설령 세상이치와 천지창조를 다 깨달아 알았다 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자기 지혜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의전적이거나 도덕적인 신앙도 있습니다.

얼마나 종교적인지요? 역시 경건의 모습일 뿐 능력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한 의전이나 자기 몸을 불사르는 도덕이라도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아무 조건 없이 “주 예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그 시작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구원의 시작이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첫 단계입니다.

영접하는 그 일 자체부터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연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되면 하나님 자녀된 특성들이 나타나 위엄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야 합니다.

옛 초대교회 성도들은 질적 향상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얻었습니다.

말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써 교회 안이 아닌 밖에서의 삶이 있어서입니다.

현대는 어떤가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삶의 열매가 관건입니다.

나무는 열매로 알듯이 신앙도 열매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요1서3:16~17)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

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

하겠느냐

 

3) 성령으로

우리 신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곧 성령의 내주하심과 도우심입니다.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주라 고백할 수 없고,

2000년 전의 십자가를 나를 위한 십자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소망의 인내도 그렇고 사랑의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이 보내신 제 3위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시고 지혜와 능력과 존귀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보혜사가 되셔서 때론 강력함이 되시고, 때론 지혜가 되시고,

때론 의로움이 되도록 하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분으로 예지력을 얻어 예언했고,

환난 받은 로마시대의 성도들은 이분으로 소망을 얻어 거룩함을 유지했으며,

많은 성도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이분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발휘한 것입니다.

현대도 이 분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초라한 기독신앙이 된 이유입니다.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도 없는 이유는, 성령이 보혜사이고, 물댄 동산이며,

샘이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여기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니 주를 믿는 일이 복이 아니라 짐이 되곤 합니다.

또 기쁜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이 되곤 합니다.

삼하6:9) 다윗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이를 바꾸는 일이 성령충만 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주를 온전히 섬기면 따를 수 있고,

짐이 아닌 복이 되고 두려움이 아닌 기쁨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삼하6: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결론) 오벧에돔의 집이 받은 복이 구체적으론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가시적이었던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잘 믿으면 이런 약속이 확실하고 증거가 분명합니다.

이런 일에 우리는 생애를 투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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