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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등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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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9-09-15 12:02 조회 38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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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맞이해서 고향을 찾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이 누구인가요? 실향민들이고 외국노동자들일 것입니다.

고향이란 묘해서 고생길이어도 가기만 하면 좋은 곳이기에 기를 쓰고 갑니다.

진정한 고향은 어디일까요?

선산이 있는 곳일까요? 추억이 있는 곳일까요? 정이 있는 곳일까요?

 

1) 아브람의 고향

아브람에게도 고향은 마찬가지로 태어나 자란 곳이고

선산은 물론 추억과 정이 있는 곳일 것입니다.

아주 익숙한 그래서 아주 편한,, 그래서 안정된 곳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향에만 머물면 안정적이긴 해도 독립적이지 못하고 큰사람이 될 수 없는지,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달리해석하면 ‘고향을 등지라 내가 새로운 고향이 되리라’ 하심입니다.

어느 날 우리에게 이런 계시가 왔다면 어떨까요?

멋지고 탐난 제안이어도 대다수 “집 떠나가면 개고생인데,,”하며 거부하거나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또 새로운 고생을 해” 하며 주저앉을 것입니다.

아님 똑똑하다면 “그 땅이 어디인데..어떻게 가는데,,어떤 일이 벌어지는데,,”하며

계산기를 두드릴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든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지만 고생만은 싫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모험적이질 않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한 정서로서,

도전은 위험하거나 무모한 일로 교육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퇴를 앞둔 목사님은 교회건축을 안 한다”가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75세의 아브람은 모험의 길을, 도전했습니다.

그는 시작뿐만이 아니라 과정도 동일했습니다.

히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의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

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람도 우리와 같은 고향중심의 안정적이고 고생과 실패를 싫어할 위인이었을 것입니다.

나중 얘기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면서 흉년을 만날 때 애굽으로 피난 갔고,

아비멜렉이란 왕이 자기부인을 예뻐하니 지키기보다는 진상했던 칠푼이 짓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우리와 달랐던 것입니다.

시작부터 발을 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첫 발을 뗀 것입니다.

아브람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론적이고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었던 것입니다.

 

2) 약속의 땅

지금이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었고, 구약의 모든 기록에서 아브람의 뒤안길을 살펴볼 수 있지만

당사자 아브람에게는 미지의 세계였고 미래의 날들이었습니다.“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즉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두 사건이 생각납니다.

42세에 미국으로 이주할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라던 꿈꾸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다녀와서는 포기했었습니다.

고생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목사로서의 목회가 아닌 목적이 맞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그리고 50세에는 이 말씀에 감동받아 교회개척을 시작했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보장된 것과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확실히 제 곁에 계심과 내가 천국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아브람도 그랬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그리고 “네가 복이 될지라” 는 말씀만 믿었을 뿐입니다.

계시에 의한 믿음이었지 자기 신념화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익숙한 세상에서 떠나는 신앙의 시작은 믿음이어야 하며 목적은 하나님일 뿐,

로또도 아니고 무병장수도 아니고 대박도 아니어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여정을 보면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 마침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또 이루어 거부도 되고, 족장도 되

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듯이 우리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길의 장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신실하셔서 기필코 그 목적을 이루십니다.

 

중요한 것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났냐?” 하는 것입니다.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림” 이고, 사도바울 의 고백처럼 “주안에서 날마다 죽는” 일이며,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 봄”인 것입니다.

 

3) 너는 복이 될지라

훗날의 아브람을 보면 이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시작은 “복의 근원” 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결국 다 얻은 셈이 되었습니다.

반면 세상은 물질을 추구하다가 이름부터 똥 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태백시에는 도박중독자들의 몰려있습니다.

많게는 기백억, 작게는 수억을 잃고 10년 넘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님을 추구하면 이름은 물론 물질도 맡기십니다.

 

현대를 사는 성도는 이런 일에 유념해야 합니다.

1957년도 노벨상수상자에게는 2명의 알베르트가 있었습니다.

평화상을 받은 쉬바이처와 문학상을 받은 까뮈입니다.

당시 상금은 10만 달러였는데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가봉에 방베레나 병원을 지어 그곳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반면 까뮈는 멋진 스포츠카를 사고 파리 근교에 성 같은 별장을 지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죽었지만 그의 인술은 지금도 귀감이 되어,,

훌륭한 의사인 경우 “슈바이처”라 합니다.

그 병원은 지금껏 운영되고 있습니다.

까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날 까뮈는 그 별장에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같은 노벨상 상금이었지만 누구에게는 복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된 반면 다른 이에게는 화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익숙한 고향을 “떠나라” 하시고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십니다.

특히 “될지라”,, 절대의 운명적인 일이 아니라 판단과 선택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성공비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성도가 가야할 미지의 세상은 모험과 개척의 불모지입니다.

그러나 갈만 한 곳이고 하나님을 경험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적 신앙을 벗어 던지고, 믿음으로 “보여줄 땅” 으로 가십시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만만치는 안 해도 “여호와가 목자이심”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런 인물 중 하나 아닌가요?

목동이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었고 인류역사에 빛나는 별이 된 이유입니다.

 

특별히 청년들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길 부탁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어느 문학을 배운 시인의 글재간이 아니고 웅변가의 선동도 아닙니다.

다윗은 물론 하나님과 동행한 성도들의 경험이고 신앙고백이며 찬송인 것입니다.

 

결론) 시편 1편을 찾아 합독할까요?

아브라함과 다윗과 신실한 성도의 보증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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