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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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영성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이 그 사람을 웅변하기 때문인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좋은 습관은 좋은 삶으로 인도합니다.
오죽하면 “세살 적 버릇 평생 간다.” 했을까요?
동서양의 왕손들이 왕도를 일찍부터 배운 것은 이런 습관을 이루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 성도
성도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하늘의 사람이 되었기에 성령을 따르는 새 성향과 새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이기 보다는 생명입니다.
주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늘 이곳을 찾으셨고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눅6:12~13)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
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런 습관을 또 보고 배우는 이들이 제자이고 집에서는 자식인 것입니다.
최근 북한의 지도자가 백마를 타고 백두산을 오른 것이 소개되었습니다.
중대결심을 앞둔 그에게는 아니 그 선대부터의 전통이고 습관이랍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습관으론 골초인 것도 확실합니다.
성도가 지녀야 할 습관이 많습니다.
전도, 예배, 선한 일, 그러나 기도가 밑바탕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선행되어야 능력은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교자이고 같은 대상인데도 어떤 때는 증인으로, 어떤 때는 변호인으로 설교한 듯하다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설
교하기 전의 설교자로서의 기도의 차이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어 듣는 이들이 다 놀랐습니다.
서기관들과 같지 않으셨는데,,그 권세 비결은 기도인 줄 믿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메리여왕은 기독인들의 학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때문에 “피의 여왕”이란 별명을 들었는데,, 이때 죤 낙스는 밤새워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메리여왕은 중병으로 갑작스레 죽어 학살은 취소되었고,
죽어가는 여왕의 탄식이 있었습니다.
뭔지 아시나요? “죤 낙스의 기도가 100만 군대보다 더 두렵다”
이 권세능력은 이미 모든 성도에게 주신 권세인 것입니다.
2) 하늘의 일
신문을 보니 불교 대승들의 동안거를 소개했습니다.
1일1식, 천막에서의 90일간의 칩거인데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이들은 하안거도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고명할수록 활동가가 많아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두루 다니셨고 땅 끝까지 가라 명령하셨기에 목사님들은 활동적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정좌를 보였습니다.
이런 차이가 역동적인 신앙과 관념적인 신앙을 만든 듯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리 역동적이어도 기도가 함께하지 않으면 지경은 넓어도 깊이가 없어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가 됩니다.
기도하는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한 번에서 세 번 그리고 수시로, 처음에는 의지로,, 믿음으로, 마침내 성령이 도우십니다.
기상 감사기도, 식사 감사기도, 잠자리 들면서 기도, 범사에 감사기도,
호흡을 늘리듯이, 운동량을 키우듯이,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듯이,, 자꾸 해야 됩니다.
거짓말도 느는데 왜 기도가 늘지 않겠나요? 기도 못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기도 속에 응답이라는 체험치가 늘어가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는,, 밤이 새도록 ( )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밤이 새도록( 기도 )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땅의 일을 구하기보다는 하늘 일을 구하여야 맞습니다.
우리의 고난의 대다수는 “기도하라” 는 주님의 재촉일수 있습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도의 기도와 비성도와의 기도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믿고 감사함으로 기도한다면 비성도는 우상 앞에 자기소원을 빌고 빕니다.
성도의 기도는 말을 못해도 어린아이의 울음을 인지하는 엄마처럼 하나님이 헤아려 들으십니다. 그러나 비성도의 기도는
기도가 능숙해도 중언부언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하나님과의 교제였는데 성도의 기도가 이렇습니다.
문제만 갖고 나가는 기도가 아니라 교제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 문제만 갖고 나간다면 어떨까요? 친밀함과 담대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밀함이 있다면 언제나 즐거운 시간일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방해할 수 없는 친밀함,, 그 시간,,
주님은 감람산이었고 밤부터 새벽미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밀함의 완성은 아버지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자 하셨지만 그래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며 그 은밀하고 친밀한 기도를 통해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희생
죽음을 받아드리신 것입니다.
이 주님은 죽으시고 장사된 후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눅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우리의 많은 문제는 시험입니다.
원수가 던져준,, 먹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죽고사는 생사의 문제까지,,
여기에 우리는 염려와 근심하여 문제에 매몰되고 근심으로 뼈가 마르고 행복하질 않습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 성령 안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
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도 바울의 경험적인 진술인데,, 맞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맛보라며 권합니다.
이는 부모에게 자식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에 관한 포괄적입니다.
뭐는 되고 뭐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은 자신의 신유은사를 소개하면서 집회를 소개했는데,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뭐는 2달 만에 재발된다 했기에 웃었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재정, 건강, 관계, 취업, 미래, 결혼, 죽음 등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조건이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순서에 유념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는 하나님을 주목한 믿음이고 “감사”는 성숙한 믿음입니다.
진급에서 미끌어진 군 가족이 있었습니다.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는데 순간 감사로 돌변해져 감사로 기도하니 감사가 넘치는 생활이 왔다고 간
증했습니다.
그는 그 감사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 이라 했습니다.
결론) 그 결과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놀랍게도 응답이 아니라 “주의 평강” 인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증거이고 응답의 전조증이기도 합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때에 방법으로 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겸손이 기도이고 겸손한 자만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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