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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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은 구주의 오심입니다.
늘 믿는 바지만 문 되신 예수님을 확증하길 바랍니다.
문은 구역간의 소통입니다.
큰문, 중간 문, 작은 문,,문이 많다는 것은 불통을 의미합니다.
옛 청송감호소에서 보았습니다.
육중한 철문을 들어가면 겹겹의 쇠창살문들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그 곳을 생각하는데 보호된 곳이 아닌 격리된 곳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 속에의 사람들은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오직 수형번호로 불리어졌던 곳입니다.
1) 성막 문
모세가 시내 산에 계시 받았던 성막에는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짠 휘장의 문이 있었습니다.
사색은 예수님의 각기 다른 성품이지만 이 문은 빗장이 없는 아주 넓은 휘장 문이었습니다.
이 휘장에는 보이지 않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들어 올 때는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이었다면 나갈 때 평안의 마음과 발걸음이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데는 개인적인 공로나 신분이나 예물이라는 조건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확실함을 증명한 것입니다.
종종 어느 교리를 믿고, 어떤 교회를 다녀야 하고, 직분이 어떻고 무얼 드려야 한다는 구실은 사람이 만든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조건은 오직 예수뿐이고 값없는 부르심에 대한 믿음의 응답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상대적이기에 “누구나 오라” 는 복음과, 값없이 후히 주시는 하나님은혜의 호의를 하찮게 여겨 자꾸만 자신
이나 세상의 무엇으로 가미하려다 실패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은 여전합니다.
“구원 받는 줄 알라”가 구원의 조건인가요? 십일조가 조건인가요? 세례가 그러한가요?
능력 행함과 능란한 기도가 그런가요? 선행이 그런가요?
구원의 열매고 고백일 뿐 조건은 아닙니다.
오래전 연변에서 한 집사님이 탈북아이를 숨겨두었다 해서 그 집을 방문했었습니다.
추운겨울 시골길을 경운기로 2시간을 갔었는데,,
8~9살의 여자아이가 불안한 듯 우리에게 인사했었습니다.
집사님은 그 아이의 신앙이 좋다며 칭찬했었고 과연 그 아이는 능숙한 기도를 울면서 했었습니다.
모두가 감동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만은 그 아이가 불쌍했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번에 임해도 좋은 신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좋은 신앙이 아닌 생존을 위한 자구책인 연기로 보여 졌습니다.
탈북아이가 그처럼 빠르게 믿음이 들어가나요?
구원에 이른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일이라지만, 쉽고 빠른 입술의 고백보다 먼저 눈빛으로 고백하게 되는데
이 진정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2) 양의 문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성에는 12문이 있었는데 그중 양의 문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 하심은 성안을 들랄날락 하는 그 양의 문이 아니라, 마을 목동들이 공동으로 양을 가
두고 보호하는 우리의 양의 문인 것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양은 주인이 있어 외부의 맹수나 도적으로부터 보호받는 특별한 양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르는 하나님 소유의 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는 완전 보호함을 받는 대상이 됩니다.
이 보호는 절대 안전입니다.
이 양의 문에는 파수꾼이 있어 문지기도 합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도둑이라면 어떨까요? 문으로 올수 없어 몰래 우리를 넘어오기 때문에 주인과 차별이 됩니다.
양의 문은 합법적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알아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심이 합법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오셨고, 무엇보다도 문지기가 되는 모든 선지자들과, 세례요한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과 성령께서 증
거 하셨고, 예수님의 모든 표적이 합법적인 그대로인 것입니다.
유대지파에 오셨고, 동정녀에게 낳으셨고,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그리고 양들을 위해 기꺼이 죽으신 선한목자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자칭 메시야라던 이단들이 많았습니다.
열가지 중에서 아홉이 맞는다 해도 아니었습니다.
100%가 맞아야 되는데 곧 예수님이십니다.
3) 구원의 문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유된 특별한 양의 문이셨지만, 이제는 인류 보편의 문이 되십니다.
“누구나 오라”입니다.
요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특별한 민족, 특별한 시대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 모든 시대의 문으로써 활짝 열려져있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고 기르시는 양이 됩니다.
구원을 받고 삶의 풍성한 보장을 얻습니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런데 아직도 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들이 전체인류의 4분지 1이 넘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다시 문밖으로 다시 나가
길 원해 서성이는 이들이 60%가 넘습니다.
문지기가 보증하지 않는 유혹하는 거짓목자에게 현혹되어서입니다.
최근 전역한 군종병이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대화 끝에 “목사님,,울산의 아무개 순복음교회 아세요?” 하며 물어왔습니다.
내가 알 수 없기에 인터넷을 찾아보라 했더니 반반이라며,, 이단 말도 있다고 했습니다.
엄마한테 물어보라 했더니 엄마가 다니는 교회라면서,,결국 엄마도 믿지 못한 웃픈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인류역사를 보십시오.
이 문에서 들어가서 보호하심을 받는 이들치고 손해 본 자가 있나요?
개인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더 나빠졌나요? 좋아졌나요?
젖은 빨래도 햇볕에 말리면 좋아집니다.
하물며 빛 되는 예수님 앞에 모였으면 영혼부터 좋아지고, 양의 문 되시는 예수님 보호아래 있으면 안전지대 살며 선한 목
자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찬287장 1절)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찬272장 1절)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갑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갑니다.
예수님은 자주 반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반복은 강조이고 확실입니다.
믿지 못하는 불신시대를 염두에 두시고 “나는 사람들에게 증거를 받지 않는다” 하셨고,
“내가 나를 증거 하지만 나를 믿지 못하겠든 내 말 보다 나 하는 그 일을 통해서 믿으라” 고 까지 하셨습니다.
이는 슬픈 외침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러셔야 했을까요?
결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고, 주고 싶으셔서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문도 없고, 떡도 없고, 빛도 없고, 하나님께 나가는 길도 없음을 아셔야 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또 믿어야 하고 거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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