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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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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9-12-22 14:00 조회 48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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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생각하면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 후까지 생각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종합비타민은 하루에 한번으로 먹는 것으로 족하지만 죽음생각은 할수록 좋습니다.

 

만약 죽음을 생각해서 우울하고 두렵다면,,

그래서 생각하기조차 싫다면 오늘의 말씀된 주인공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1) 나사로의 죽음

주님은 평소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또 상황에 맞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에서 “나는 떡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하시지 않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셨으니 경우에

합당하여 은쟁반의 옥구슬입니다.

 

형제를 잃은 유족들에게 단순한 위로 차원이 아니라 당신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요즘 도는 말이 있습니다.

“힘내라고 해서 힘이 생기냐 사랑한다고 해야 힘이 나지”

그런데 실제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슬픈 유족들에게 “부활과 생명을 믿고 위로 받아라”가 아닌 당신을 주신 것입니다.

이 모습이 참된 양의 문 된 역할이어서 그 문으로 들어가서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 것이며, 또 자기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역할입니다.

 

인류역사에 이런 일이 어디서 있었나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아주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러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했습니다만,

위대한 성현들과 주님이 다른 것은 그들은 대신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무덤이 보존되어 종교성지가 되었다면 주님의 무덤은 없습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십니다.

주님께만 사용된 표현이 있습니다.

계1:18) 곧 내가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이 사실만 눈여겨보아도 주님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가문에 성경대로 오신 메시야요,

참 하나님아들이심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오직 주님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양계가 발달하면서 닭은 커졌으나 맛은 옛날만큼 없어졌습니다.

그 맛없는 육계를 보충한 것이 양념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체적인 음식에서 본래 고유한 맛은 없어지고 온통 맵고 짜고 단 음식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고기도 그래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본연의 맛없이 오직 비슷한 양념 맛뿐입니다.

다 비슷한 사료를 먹고 비슷한 방식으로 사육된 탓일 것입니다.

 

때론 우리 신앙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주님 보다는 건물을, 예배자인 주님 보다 예배자가 돋보이는,,

교회당에 온통 현수막으로 장식되는 것이 이런 면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주는 주님이십니다.

경배의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믿음의 근거는 진리인 성경입니다.

믿음은 행동과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는 교회를 믿고, 자기 기쁨을 추구하고, 느낌이나 경험이나 인문학에 근거를 두고,

또 잡다하니 많은 종교생활들이 예수님께 거치는 양념이 된다면 거두어야 합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2) 부활이요 생명이니

부활이 무엇인가요? 죽어도 다시 사는 능력입니다

생명이 무엇인가요? 죽을 수 없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자체고 생명자체입니다.

부활 같거나 생명 같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친구가운데 부자도 있고 똑똑한 이들도 있고 유명인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과 실제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그들 중에 어느 하나가 아닌 나일뿐입니다.

 

주님의 많은 자기계시 중에 무엇과 비슷하다 하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딱 부러지게 확정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중에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고자 수고와 시간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농담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아는 현상이 함께 옵니다.

 

이 믿음과 지식으로 그 사람은 참 빛과 영생을 얻고 세상 속에 살면서 다른 별의 사람처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의 성품에 참여했다 합니다.

그 증거가 초대교회 사람들이었고, 종교개혁기의 경건한 사람들이었고,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었고, 한국교회초기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유감되게 지금은 그 후손들과 그 신앙들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편리를 추구하며 적당히,, 세상과 돈에 타협하고 아니면 팔아넘기고,,

왜 그럴까요? 죽음이,, 죽는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왜 두려울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의 존재가 없어서입니다.

이 존재의 여부는 생사의 여부이고 영원의 흥망을 결정짓습니다.

 

3) 죽음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생뿐만이 아니라 죄에 오염된 모든 만물이 다 같은 처지입니다.

죽음,,이라는,, 여기에는 다 같은 두려움이 임합니다.

우울증이 아니라면 죽음을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지난주일 여단본부에서 한 중위가 자살했다며 조문 가는 일을 보았습니다.

이런 애기를 딸아이한테 하니 딸아이는 말 중에 동물들을 생각했습니다.

“동물들은 너무 불쌍해요,, 먹다가도 잡혀죽으니 얼마나 긴장들을 해요”

맞습니다. 그러나 동물들만이 아닙니다.

아는 권사님은 새벽 1시에 화장실에 쓰러졌는데 마침 딸이 발견해서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듯 죽음 앞에 놓여 있습니다.

혹시 자기의 죽을 날과 시간과 장소를 아시는지요? 모르기에 불안하고 두려울 뿐입니다.

기껏 해서 생명보험을 들지만 실제 자기 죽음과 자기에게는 무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희망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죽음은 내 죄로 말미암는 희생죽음이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내 부활의 첫 열매로인 것입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처럼 디자인하셨고, 주님은 실제 이루셨고, 성령님은 믿게 하셨고, 성경은 예부터 기록

해 놓은 것입니다.

 

이를 믿는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믿는 것이고,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로 믿고 감사하며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증거를 주십니다.

 

성탄절은 이런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내심을 받은 날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려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죄인을 찾아 가장 낮고 천한 신분으로 오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보고 다 환영하지 않습니다.

양이 아닌 염소도 있고 변장한 이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요1:10~14) 그가 세상에 계셨으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

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

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결론) 성탄은 색으로 표현을 하곤 합니다.

적색,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을 의미합니다.

설교단 뒷편도 이 색의 휘장으로 장식하곤 합니다.

성탄절의 붉은 색은 산타가 아닌 주의 보혈임을 명심하고 연상해야 합니다.

 

녹색,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흰색, 순결입니다.

성도는 주님께 순결해야 신부로 합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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