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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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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01-12 14:00 조회 45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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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드비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평판, 평가, 지적, 충언을 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듣지 않고 자신이 느낀 대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 이래야 돼”하는,

여기에 추가되는 말이 있는데 “다 너를 위해서야” 한다면 어떨까요?

현대는 꼰대질이라고 거부당합니다.

 

반대로,, 듣는 상대방도 무슨 소리든 다 잔소리로 간주해서 거부부터 한다면 어떨까요?

이쯤 되면 가르침도 배움도 의미가 없습니다.

 

1) 가르침과 배움

“뿌린 대로 거둔다.” 는 인과응보의 법칙은 무서운 진실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데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예루살렘이 탄식과 고통 속에 망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음이라

사람의 계명에는 하나님과 거룩, 예수님과 생명이 없습니다.

 

현대에는 교회만이 아닌 가정, 학교 등 사회 전반에서 이런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징비록”을 아시지요?

영의정 유승룡이 몸소 체험한 7년의 임진왜란을 회상하면서, 전쟁준비 못했음을 스스로 징계하고 이를 교훈 삼아 평안할

때 전쟁 대비를 하게 했던 피맺힌 지혜서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조선 보다 일본에서 먼저 발견되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발견했는데 당시의 조선은 안일과 붕당으로 가르침을 거부했던 탓입니다.

또 열하일기의 박지원이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했을 때 뗏놈에게 무얼 배우냐며 거부했고 오직 성리학만 신봉했던 그 조

선이었기에 그 결과 어떤가요? 망했습니다.

 

가르침은,, 좋은 내용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맞는 말씀이고, 좋은 말씀이고, 위하는 말씀이라도 잔소리로 들리게 한다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과목이 있고 교사가 있고,, 교수법이 있고,, 잘 가르치면 훌륭한 교사라 합니다.

그러나 또 배우는 이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개떡 같이 가르쳐도 찰떡 같이 알아들으면 좋겠는데,,

찰떡을 가르쳐도 개떡으로 알아들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30: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특히 신앙에 있어 하나님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과 귀 막는 이들은,,

짝퉁 제품을 제조하거나 좋아하는 사람과도 같아 결국 다 망하는 근본입니다.

 

최근 한 교단의 신학대학교에서는 교수들과 직원들이 2000명모여 영성수련을 했습니다.

주의 부활을 학문적이지만 않고 실제적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믿을 것을 강조했답니다.

교수가 부활을 믿지 못하면 신학생도 그렇게 되고 성도도 그렇게 되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이 벌써 있었기에 “그러지 말라” 고 영성수련에서 당부까지 한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가 모호일 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합니다.

이런 경우 누구 탓일까요? 누가 먼저 나서야 하나요?

잘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가 먼저 인가요?

아님 잘 배우고자 하는 훌륭한 학생이 먼저 인가요?

책임 있는 교사부터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훌륭한 대장장이는 연장을 탓하지 않듯이,

교사는 좋은 내용만이 아니라 불량학생이라도 여하한 학습의욕을 끌어내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가르친다거나 혹은 잘 배운다 해서 고수나 달인이나 장인은 아닙니다.

이는 신앙적으로는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하나님경외의 한부분이고,

학문인 경우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됩니다.

 

2) 고침

회개는 깨닫고 돌아서는 행위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한번으로 족하지만 믿노라하면서 깨닫는 고침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고침은,, 하나님말씀을 옳게 가르침과 들음은 절대로 자기 입맛대로가 아니어야 합니다.

민주국가는 국민이 바라는 경향대로 갑니다.

현 우리의 정권은 국민들의 입맛이고 정치인들은 국민의 뜻을 따라 표를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식당도, TV이나 여러 문화의 성질도 소비자의 입맛 따라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교인들의 입맛대로 되고,, 학교가 학생들의 입맛대로 되는데 문제가 큽니다.

바보는 바보 얘기를 싫어하듯이 죄인은 죄의 지적과 가르침을 싫어합니다.

한참 놀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밥줄이라며 붙잡히면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인기나 재미중심으로 사람의 계명이 등장하고 행사 위주가 되어 버린다면 어떨까요? 학교역시 엉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항시 역사의 반복으로서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 입맛”을 내세우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아닌 항상 주가 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리석고 어둡게 방치하십니다.

사29: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

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기이하다” 일반적이지 않는, 특별한 경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밝음과 깨달음을 주실 상황에서 반대로 가리우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포기이고, 끝장을 보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행하리라” 는 무엇인가요? 반복된 패턴으로,, 인류역사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인문학이, 그 중 철학이 외면당하는 시대가 그냥 왔음이 아님을 실감했습니다.

왜 외면당할까요? 하나님 말씀은 부담스럽고 철학은 실용적이질 못하니,,

결국은 살고자했으나 죽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뵈뢰아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자세가 나옵니다.

행17:11~12) 뵈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

니하니

 

우리는 진중하고 예의바르면 흔히 “신사적”이라합니다.

본문에서는 “너그럽다” 했는데 그 너그러움이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였고,

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했습니다.

한마디로 대충적이질 않은 모습입니다.

소비자가 깐깐하면 판매자도 깐깐하고 상품도 깐깐해지기 마련입니다.

반면 대충적이면 다 대충적일 것입니다.

하나님말씀 앞에서는 모두가 깐깐해야 신사적인 신앙이고 너그러운 믿음입니다.

부흥시대를 보면 설교자의 설교가 논증되므로 1시간 이상이었습니다.

또 그 설교를 듣고자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배 와서 30분 설교도 길다고 푸념들을 하곤 합니다.

그 시간에도 사모는커녕 집중도 못합니다.

 

3) 약속

하나님은 때리시고 싸매시기에 확실한 말씀의 신앙을 위해서 새 영을 보장해주셨는데 이미 오신 성령이십니다.

사35: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

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

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라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은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잘 듣게 하시며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전할 말씀도 입에 넣어 주십니다.

어부출신의 제자들이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던 능력비결이기도 합니다.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구약의 에스더서는 성령론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어려서부터 양육했던, 왕후가 되기 전 그녀에게 지혜의 말을 넣어 주었던, 유다인 민족이 죽게 되었

을 때 성문 밖에서 대성통곡했던, 에스더 왕후가 죽을 민족을 위해서 할 바를 깨닫고 왕 앞에 금식 기도 후 “죽으면 죽으리

라”의 그 행동결심을 넣어 준, 나중에 총리가 되어 유다인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법을 반포했던 인물입니다,

모르드개가 보혜사이신 성령의 모형인 것입니다.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결론)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구하고 사모할 때 변질된 선지자와 선견자에게는 떠나셨어도 다시 임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나요? 때론 두드리는 몽둥이처럼, 불처럼, 바람처럼,,

그렇다면 대언자와 듣는 자신을 위해 순결하게 삶을 이루고 기다리십시오,

사람의 일만 마디 말보다 이 분 한 마디가 더 생명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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