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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본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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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01-26 19:35 조회 45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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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도 안 돼는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속담처럼,

사람을 아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현대는 인성검사가 있다지만 무엇보다도 돈사용이 그를 웅변해 줍니다.

돈은 누구에게나 관심사항이고 시간을 투자한 만큼 그 사용은 확실한 관심행위가 됩니다.

 

1)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은혜를 입은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 일입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나그네들을 보고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대접하기를 청했으니 이는 아브라함의 관심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나그네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가 아닌,

“어떻게 섬길까” “무엇을 나눌까” 한 마음이고 보면 바보일까요?

도리어 정반대적인 믿음이었기에 훗날 교훈이 되었습니다.

히13:2)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믿음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말씀에 순종으로 사는 일이고 주님이 보이신 본을 따라 사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큰 은혜가 그냥 온 것이라도 이렇듯 믿음으로 응답하므로 자기화,,형상화,,구체화 시킨 것

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 안에서 거룩하고 아름다고 원대합니다.

벧전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오죽하면 천사가 흠모하는 존재인가요?

그럼에도 초라하게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부족이 아닌 대체로 믿음 없음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관심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눈이 어디에 “들어 본즉” 했고,, 내 시간과 물질이 어디에 사용되었으며, 내 행동과 기도가 무엇을 향했는지가 증거들

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유감스럽게 나의 믿음의 질양이고 총량입니다.

 

2) 믿음의 행동들

믿음은 소원만이 아니고 기도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생명력이고 인격이고 삶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는 어떨까요?

* 범사에서 다른 마음과 안목이 있고 다른 행동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한말 성공회소속의 ‘이사벨라 버드 비숖’ 이라는 여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북한강 일대와 금강산, 원산, 블르디보스토크를 순례하면서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조선의 관리들은 기생충,, 믿는 백성들은 게으르지 않았다.”

또 “이런 백성들을 통해서 어떻게든 발전이 이루어질 것” 이라 했습니다.

당시 믿는 백성들의 숫자는 아주 미미했으나 질은 달랐고 높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으니 믿음의 산 거룩함이고 사랑입니다.

창18:2) ~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창18:4~5)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엎드려 절 받기 식” 이 무엇인줄 알지요?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책임이 있고, 삯도 있고,

주변의 눈도 있어서 마지못해 하는 경우인데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귀찮으즘이 뼛속까지 스몄을,, “나이 많은”족장으로서의,,중동의 한참 더운 낮 시간 때의,,

시원함을 찾아 장막 문에 앉은 아브라함이었지만,

억지가 아닌 믿음의 자원함으로 움직였습니다.

창18: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창18: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

지라

 

특별히 송아지를 잡는 일은 자기 소유가 줄어드는 일이고,, 아주 번거로운 일 아닌가요?

이 모습에 나를 반영시켜 보십시오.

이처럼 신날 수 있을까요? 나는 어떤 일에 신날까요?

처음 보는 나그네,,곧 떠날 나그네라 할지라도 귀하고 귀하게 여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물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실제는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도 했었고,

세례요한도 자기 죽음 앞에서 의심과 회의가 들어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

“오실 이가 당신이니이까?” 하며 확증을 바라기도 했었습니다.

이처럼 실수투성이의 오점 투성이었으나 점점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에게 군림한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서 자기 소유로 섬겼던 것,

결코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빼앗었다가 죽어야 했었습니다.

흔히 누가 무엇을 하면 할만한 형편이라고 치부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행 가는 다수는 오랫동안 모아서 떠나는 이들이고 결혼도 그렇고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수 있는 여건에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의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꽃제비시절 기차에서 떨어져 한쪽 다리와 손을 잃은 탈북청년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목발을 짚고 5만 km을 거쳐 탈북한 청년인데,

UN에서 연설도 하고 트럼프가 2번 초청했었습니다.

그가 예수 믿고 변화 된 후 탈북자 구출 사역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최근 범 교회연합새벽기도회에서 1명의 탈북자를 데려오는데 200만원이 필요하다고 눈물로 호소하니 수백명분이 답지했

는데 결코 여유 있는 자들의 후원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그네인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보듬었던 것이나,

탈북청년이 탈북자를 위하는 일이나 다 같은 믿음으로 된 사랑의 수고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통해서 기적만 구하고 자신의 유익만 찾는다면 믿음의 순도는 불량입니다.

 

3) 내 년 이맘때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은 나그네들은 다름 아닌 천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신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18: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 덕에 사라는 피식 웃었습니다.

늙은 여인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가당치 않아서였으나 1년 후에는 진짜 함빡 웃었는데 횡재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란 이름이 “ 하나님이 웃게 하셨다”는 그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금도 여전히 믿는 자들을 함빡 웃게 하십니다.

이런 복이 얼마짜리가 될까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의 전유물이고 공짜이며 응답이고 보답이기에 웃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성향이 달라졌고 믿음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소망과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면,,

땅보다는 하늘에 관심이 가고, 높은 자리보다는 낮은 자리에, 번쩍이는 문화 보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가며 귀하게 여김

이 마땅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여전히 옛 성향을 따라 살면서 아브라함의 복만 부러워 행동한다면,,

그 일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짜와 가짜의 감별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마음이 가며 눈길이 머무는가요?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면 사람들이 보여야 합니다.

사람구경이 아닌 주님이 찾으시는 하나님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미숙 씨와 성숙 씨가 있습니다.

미숙 씨는 자기와 닮은 사람만 좋아했고, 성숙 씨는 다른 사람도 좋아했습니다.

미숙 씨는 매사에 좋고 싫고를 따지지만, 성숙 씨는 선택에서 제외된 남은 것까지 살핍니다.

미숙 씨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찾지만, 성숙 씨는 자기가 꼭 해야 할 일들로부터 배웁니다.

나는 어떤 믿음의 친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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