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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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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02-02 14:39 조회 43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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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무거운 주제를 생각해 보려합니다.

인생살이가 진중하기 때문입니다.

 

1) 죽음의 모양

죽음의 모양이 다릅니다.

최근 재벌총수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장수했고, 조문객들이 많았고 비교적 편안한 죽음이라 여겨집니다.

 

집사님부친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85세의 삶을 사신, 그러나 끝 날에 가서 고통스러웠고, 명절 전날이이라서 조문객들과 유족들은 당황했을 죽음이었습니다.

 

미국의 농구선수가 자가용 헬리곱터를 타고 농구시합을 구경 가다 일가족이 추락사고로 죽었는데 아이도 있었습니다.

앞서 이란 민간항공기의 사고, 또 신종바이러스 코로나에 의한 죽음 등,, 다양합니다.

 

어느 죽음 치고 슬프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모양은 무엇이든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마10:29)에서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자 않느냐 그러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기에 동물은 물론 모든 태어남과 죽음도 섭리하십니다.

 

베드로는 무교절이 끝난 후 곧 죽을 운명이었으나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살려내셨습니다.

요한의 동생 야고보는 죽었는데 비해 베드로가 산 것은 비교됩니다.

그러나 그러했던 베드로도 주님이 예언하신대로 십자가에서 주님처럼 죽어야 했습니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게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참새도 하나님의 주권이 미친다니,, 하물며 사람은 어떻고 성도는 어떨까요?

죽음은 사명을 마쳤다함이요,

혹 죽을 지경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함은 사명이 아직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은혜의 날이고,, 사명완수의 날이라 하여 감사함으로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됩니다.

 

세례요한은 짧은 생애를 살면서 회개의 복음을 외친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생애 모습을 보면 사명완수를 위해 달려간 삶이었습니다.

행13: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 사명

사람의 사명은 다릅니다.

세상은 사람을 위하고, 사람은 주님을 위하고, 주님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되었듯이,

은사가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목표가 달라도,

긍극의 목적은 하나님께 두어야 참 가치 있습니다.

 

집안 살림을 잘 살아주는 것 사명이고, 좋은 음식 건강한 음식 만들어 제공하는 것도 사명이고, 공부하는 것, 직장생활 하

는 것도 사명입니다.

다양한 세상에서 한두 가지만 하나님을 위하는 사명과 은사가 아닙니다.

직접적인 사명이 있고 간적적인 사명도 있습니다.

성도인 나는 그 사명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충북 대소에 심방을 갑니다.

그곳 전무님은 집사님이신데,,그 공장의 150명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선교사격입니다.

주의 친절로 노동자들을 대하지만 공장을 위한 일이고, 자신의 위한 일이라도 최종적으론 하나님을 향한 목적으로 이어집

니다.

 

그 곳에는 친구회사도 있기에 차를 멈추고는 축복하곤 합니다.

얼마 전에도 그랬더니,, 외국 출장 중이라며 고맙다는 인사가 왔습니다.

그는 1년에 절반이상을 외국에서 일하는 사장이었기에

사는 목적이 궁금해서 한 글을 보냈었습니다.

“돌을 쪼는 석공들이 있는데 망치소리가 달랐습니다.

처음 석공은 벌어먹고 살려고 이 짓한다는 석공이었고,

두 번째 석공은 돌이 좋아 자원하는 석공이었습니다.

마지막 석공은 사랑하는 처자와 살 집을 짓는 주인이었습니다.“

 

다시 그로부터 답이 왔습니다.

“난 뭐를 위하는 석공인지,,ㅉㅉ” 목적을 잃은 모습 같았습니다.

무슨 일보다는 가치를 찾을 때 감사로 임하며 세월을 아낄 수 있습니다.

성도의 가치는 먹던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영광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에는 이런 모양이 확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어떤가요?

순교자적인 죽음입니다.

 

19절을 봅시다.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샤로 내려가서 머무니

라”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로 감옥에서 도피하자 그를 지켰던 파수꾼들은 문책을 받고 처벌을 당한 것인데 황당하고 억울한 죽

음입니다.

 

23절을 마지막으로 봅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왕의 죽음이라지만,, 꼴사나운 죽음입니다.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도 아니고, 지병으로 죽은 것도 아니고 벌레에게 먹혀 죽었으니,,

권세의 허무를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이 셋 중 하나입니다.

많은 독재자들은 헤롯과 같습니다.

많은 일반들은 파수꾼들과 같습니다.

많은 사명자들은 야고보와 같습니다.

오래 사는 것 보다는 잘 살아야함을 교훈하고 있지 않나요?

 

3) 훌륭한 죽음

죽음에도 훌륭함이 있습니다.

호상하고는 다른 모양입니다.

언제 죽느냐? 어디서 죽느냐? 어떻게 죽느냐? 가 아닌,

주님처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주께 의탁 하나이다” 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무섭게 쏘는 죽음의 문턱에서, 생물적으로 가물가물해 지는 그 순간에,,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인도하셨고, 나를 기다리시는 그 분을 주목하며 믿음의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아니 나를 영접하시고

자 보좌에서 일어서신 주님을 볼 수 있다면,,

이 모습이 주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은 출중한 죽음입니다.

비록 생애는 짧고, 모습은 초라하고, 신경이 살아서 아파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있는 죽음입니다.

삶의 아름다움과 성공은 여기에 있으며 믿음의 위대함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죽음을 소망하십시오.

부자 되거나 오래 살기 보다는,, 매장이냐 화장이냐 보다는,,

요1서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결론) 유교적 전통으로 죽음은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은 천국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영원한 이별과 영면이 아니라 천국의 입성이고 부활을 위한 첫 과정임을 믿읍시다.

여러분은 어떤 죽음의 초상을 같겠나요?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같은 죽음도 있습니다.

말년으로 갈수록 삶이 좋다가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 돌아가고 후손들은 잘 장례해주는 특별한 죽음인데,,이를 희망하는

일은 자유지만 이루는 일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이 설교에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죽게 되었을 때 위해서 교회가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게된 베드로를 위해서는 교회가 간절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만이 아닌 기도할 때에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날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 자세로 삶의 모양과 질은 달라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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