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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02-09 14:28 조회 42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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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하고 치면 터지는 게 있고 으르렁거리는 게 있고 자기 몸을 웅크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반응은 성향과 기질 따라 다릅니다.

국내의 한 유명 범죄심리학자는 동물 프로만 본답니다.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볼 수 없어서 랍니다.

 

성경은 사람을 정의했습니다.

“만물 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은 그 해답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또 “거듭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오늘 성경은 이와 같은 문제와 답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유대인들

종교인이면서 사람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고 광기를 부린 유대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스테반집사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를 증거 했는데,

그 복음이 싫고 자신들의 믿음에 반해서 스테반을 돌로 쳐서 죽게 했습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사울도 그의 죽음을 당연시했었으니,, 이런 현상은 무서운 일입니다.

흑백논리로서 나와 다르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는,,사나운 성향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논쟁주제는 신앙이었는데 “신성모독” 이라며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탓에 훗날의 사도바울도,, 베드로도 그렇게 죽은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 때는 어땠나요?

죽을죄를 찾지 못하겠다며 무죄를 선언하자

그들은 거부하며 죄인 바라바를 대신 석방시키기도 했었습니다.

동물보다도 못한 모습으로,, 개도 겉으로 판단하지 않고 종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뛰어 놉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희망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데 있습니다.

행7:57) 그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이 발 앞에 두니라

 

복음 앞에 세상은 두 부류로 나눕니다.

뻔뻔하냐? 뻔뻔하지 않냐? 뻔뻔하지 않다는 것은 양심이 작동한다는 뜻으로 잘못을 인정하며 깨닫고 고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뻔뻔한 부류는 억지를 부리거나 속이려하고 또는 구실을 댑니다.

이런 반응은 사회, 문화, 정치, 예술, 종교 등 전반에 대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복음은,, 뻔뻔한 경우를 뻔뻔치 않는 양심적으로 만듭니다.

거듭남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는 전통적일수록 뻔뻔해지지만 복음은 그 반대적 성향과 기질을 갖게 만듭니다.

 

2) 스테반

스테반은 초대교회의 집사인데 흔하디흔한 날라라집사가 아니라 훌륭한 집사였습니다.

행6:8) 스테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성경은 얼마나 박식했던지,, 아브라함부터 구약의 역사를 꿰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복음의 신앙이었고 성령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은사적 충만은 주의 종으로서 주의 일을 이루기에 합당한 능력이고,

성숙적 충만은 주의 사람으로의 성숙입니다.

스테반은 이 둘의 소유자였기에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고,

유대교공회 앞에서나 거짓증인들 앞에서나 대제사장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으니,, 성령 충만한 영적 권위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런 스테반도 처음에는 주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주의에 빠졌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는 거듭났고 성령의 집사가 되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역시도 본래 교회의 핍박자였지만 변화되어 기독교초석을 만들며 이방인의 선교사로 살았고 마침내 로마

에서 순교했습니다.

외견은 같아도 전혀 다른 모습의 성향과 기질의 사람이 된 것인데,

삶이 고쳤진 것은 율법을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드렸기에 가능했습니다.

모세를 통해 내리신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죄를 깨닫기 위한 방편이고,

참 구원자는 예수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덜 뻔뻔함이 거듭남의 복으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복음은,, 희망 없고, 뻔뻔하고 강팍한 사람을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만들고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으며 뭐든 살리는

존재가 됩니다.

스테반은 죽어가면서 유대인들에게 맞서지 않고 독설도 퍼붓지 않았습니다.

행7:59)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행7:60)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했습니다.

 

누구나 반응하는 반응이 어른은 어른답게, 아이는 아이답게,, 지성인답게,,신앙인답게 반응해야 건강한 사람이고 양심이고

사회입니다.

그런데 죄는 그렇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고 희망을 없게 만들었습니다.

뻔뻔함의 극치를 이루어 자기만 있고 주변은 없게 했습니다.

타락의 모습이고 양심에 화인 받은 모양입니다.

종교만 갖고는 부족합니다.

종교적일수록 겉치레에 붙잡히기 쉽기 때문입니다.

스테반을 죽인 유대교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고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정의는 있었지만 하나님이 마음에 없었기에 진정한 공의와 사랑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고르반”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뜻으로 무엇이든 “고르반”하면 사람에게는 베풀 수 없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소치입니다.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의 떡이라도,, 제물로 바치려하다가도 굶고 아픈 사람에게 절실하다면 나눌 수 있음이 진정한 하나님공경인

데 그들은 정신과 마음은 놓치고 껍데기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비슷하게는 현대 성도에게는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없다면 이 역시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마23:23)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

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설에 “몽골에 간 의사”라는 5부작 프로를 보았습니다.

부부가 대학동창이었는데 일찍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부부의 의술은 온통 그곳 사람들을 살리는데 쓰였고 제자양성에 있었습니다.

그가 잠깐 쉬면서 독백을 했습니다.

“잠깐 컴퓨터를 켜면 온통 빚 달라는 독촉이 와요, 그런데 신기하게 그게 딱 그만큼만 채워지곤 해요”

마지막으로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원장이에요, 의사에요, 선교사에요”

 

누구의 말처럼 사람에게서 희망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는 이처럼 희망이 있습니다.

스테반도,, 사울이라는 청년도 변화되었고, 지금도 오대양 육대주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살리는데 헌신하는 이들이 많

기 때문입니다.

 

3) 일어서신 주님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욥기에는 천상에서의 하나님과 마귀의 대화를 기록해 놓았고,, 지금처럼 천상의 예수님모습도 기록해 놓았으며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외친 말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행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인자는 예수님이셨습니다.

행7:55) 스테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예수님의 반응이 보이나요? 왜 하나님우편에서 일어섰을까요?

복음 전도자에 대한 반응으로 스테반을 맞이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열렬히 환영함으로 천국에서는 순교자의 상이 으뜸입니다.

또 반대로 스테반을 돌로 쳐 죽인 자들에 대한 반응일 것입니다.

“누구냐? 내 종을 죽이는 자가 ,,얼굴 좀 보자”

물론 의인화된 표현입니다만 모든 심판은 주님께 있음을 웅변하고 입니다.

 

결론) 유대인들과 스테반과 주님의 반응을 보았습니다.

성도된 나의 반응은 어떤가요? 믿음은 하나님께 최상의 반응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웃과 고난과 죽음에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성향과 기질을 발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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