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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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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02-17 08:21 조회 39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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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지방도시에 사는 집사님을 심방했더니 그 집사님이 귀뜸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여기서는 돈 자랑 못해요” 한마디로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뜻이었습니다.

 

1) 자랑

자랑은 만지거나 보이지 않는 뿔이고 관입니다.

못하면 상처를 주고 좋으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한 영화감독이 아카데미상을 상을 4개나 받고,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미국과 캐나다 찬송집에 올려지고, 대한

민국 여권이 세계 2위로 무비자여행이 가능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자랑은 힘이 됩니다,

직장인들이 많이 모인 곳에는 목에 건 패용증이 은근 자랑이 되는데 패용증 줄에 회사로고가 있어서,, 비교적 쉬운 자랑이

됩니다.

그러나 돈을 뿌리는 돈 자랑, 코로나 전염증이 창궐한 지금 마스크를 지갑에 넣고 다니며 보여주는 자랑, 양주 자랑, 건강

자랑은 역겨운 자랑 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깔대기 자랑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한참 얘기하다가 결국은 자식 자랑, 아내 자랑, 자기 자랑으로 모아지는 경우인데,,

옛날에는 팔불출이라 했던 일이지만 이 정도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거짓이 아니라면 봐줄만합니다.

 

그러나 봐줄 수 없는 그야말로 어리석음과 악함을 드러내는 자랑 질이 있는데

전과자랑, 문신자랑, 주량자랑 등,,그러므로 자랑의 내용은 그 사람을 대변합니다.

 

학자는 논문의 숫자와 유명학술지에 발표를, 예능인은 청중들의 반응을, 식당은 메스컴의 소개와 유명 방문자의 싸인을,,

어느 분은 명함에다 역대 직함을 넣고, 또 어느 분은 인터뷰 프로와 날자 까지 박았습니다.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일 뿐입니다.

이런 자랑은 성도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모든 정과 육체의 탐심을 십자가에 다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기에 되레 침묵하며 감추고자 합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럼에도 자랑한다면 그것 밖에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자책골과 같은 허세이니 긍휼히 여겨줘야 합니다.

 

2) 사도 바울의 자랑

사도 바울이 자랑을 했습니다.

이 자랑을 본 받는다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자랑 했나요?

첫째, 예수 자랑이었습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

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라는 것,, 숫자는 적었으나 정통 유대 왕조인 사울왕의 후손이었습니다. 율법적으로는 엄격한 가멜

리아 파인 것, 율법에 의해서 흠이 없었고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당대의 로마시민권자인 것과 헬라 말을 했던 것 등,

 

현대적으로 의역한다면 이씨 왕손이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명문학교 출신이고, 독립운동, 6,25참전, 광주의거, 민주화

운동에 다 동참했고,, 미국시민권을 지닌 사람인 셈입니다.

이런 자랑사야 과거지사로 치부해도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은 것, 3층천에 다녀온 것, 수다한 기적과 환자를 고친 것 등,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변화는 주님을 만나서부터였습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을 안 만큼,

예수님 외에는 어떤 가치를 붙잡거나 자랑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께서 자기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고 살리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구원

의 방편으로 믿어서입니다.

 

이토록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완전 변화 시켰습니다.

믿노라 하면서 허튼 자랑이 여전하다면 그 변화는 위선으로 여겨도 됩니다.

 

둘째, 자신이 날마다 주 안에서 죽는 일이었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 하노니 나

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죽음에 화들짝 놀라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니”

자기 죽는 것을 즐거워하고 잘 죽어가는 자신을 자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두 의미가 있습니다.

* 겉 사람이 세월만큼 죽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늙는 것을 보면 슬프답니다.

왜 슬프냐 물으면 언젠가 죽을 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달랐습니다.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일로 믿었습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

다

주의 부활은 부활이고 그러나 내 부활은 없다고 믿는 데에는 이런 소망과 믿음이 작용하질 않습니다.

부활은 진실이고 사실입니다.

주의 부활은 첫 열매인 만큼 그리스도 안에 죽는 모든 신자는 그처럼 부활할 줄 믿어야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산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날마다” 단어가 증명합니다.

우리는 한번 죽지 날마다 죽지 않습니다.

이 날마다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산다는,,여기에 능함을 자랑한다는 감사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육체로 한 번 죽은 것이 두려우면 의미적으로 날마다 죽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두려운데 어떻게 죄를 이기겠나요? 상식적으로도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부활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생활이어야 하고 주님과 연합으로만 가능합니다.

 

셋째, 교회자랑입니다.

빌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

라

 

사도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첫아들이고 맏아들 같이 대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든든해서 자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웅장한 건물이나, 교세가 크거나, 선교비를 많이 담당하거나, 이방인의 교회라서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빌립보교회가 복음적인 교회여서입니다.

친교를 위한, 구제를 위한, 지역을 위한, 다음세대를 위한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는 복음중심인 예수를 향한, 예수를 으뜸으로 위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라는 말처럼 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선교에 적극적이었고,, 환난 중에도 두려움 없이 선교에 매진했던 것입니다.

빌1: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

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로서는 당연지사지만 실제는 어렵고 잘 안 되는 일이 이 일입니다.

천사가 아닌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파벌과 다툼도 있고, 예배와 기도 보다는 종교행사에 치중하고, 사람을 믿고,, 아니라지

만 은연중에 짙습니다.

주변에서 들리는 교회자랑들을 들어 보십시오.

무엇을 자랑하는지,, 그러나 이 교회는 꾸준히,,

불같은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면서 선교적이었던 것이 아주 훌륭했던 것입니다.

 

결론) 성도의 자랑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예수님 안에서 믿음은 하나지만 다양한 우리는 자랑도 같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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