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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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솔 벨로우는 시카코대학교 교수였는데 유년의 체험을 통해서 자유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
습니다.
그는 집근처 숲에서 야생동물을 잡아 집에서 기르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쁜 새소리에 끌려 새끼 새 한 마리를 새장에 키우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잡아 온 이튿날부터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와 새끼에게 주곤 했습니다.
새끼를 돌보는 어미 새의 모습에 감탄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미로부터 먹이를 받아먹고는 새끼 새가 그만 죽었습니다.
마침 유명한 조류학자가 아버지를 만나러왔기에 그 궁금함을 물었는데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어미 새는 자신의 새끼가 새장에 갇힌 것을 알고는 일부러 독초를 먹인 것입니다.
평생을 새장에 갇혀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긴 나머지,,
그 후로 다시는 야생동물 채집을 하지 않았답니다.
1) 자유
한낱 새에게도 자유는 이토록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자유가 무엇인가요? 생명체에게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 자유가 충분히 있을 때는 고마움을 모르지만 없을 때는 자아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자유의지의 존재로 창조된 것은 자유를 통해 자기 인격을 스스로 완성해 나가라는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져 있어서
입니다.
만약 완전체의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사람은 성취할 목적도 희망도 없어진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시련이 닥쳤다면 그것을 해결할 책임은 당연시 자유의지를 지닌 나에게 있습니다.
시련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그 사람은 자유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미숙한 사람입니다.
새도 아는 진실을 사람이 왜 모를까요?
이 자유를 하나님이 인류의 시조인 아담하와에게 최초로 주셨습니다.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완전 자유인가요? 제한된 자유인가요? “먹지 말라”는 금지가 있었기에 제한된 자유입니다.
완전 자유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지혜와 능력과 인격이 절대완전체이기에 완전자유의 주체가 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탁월한 창조물이긴 해도 제한되어야 합니다.
예리한 칼일수록 칼집에서 보호되듯이,,
그것이 안전하고, 합당하고, 그것이 하나님과 화목과 화평을 이루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과 아내인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유혹한 마귀의 말에 넘어갔습니다.
잘못된 자유의지의 선택이었습니다.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대조적인가요?
이 잘못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사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마귀가 주인이 되어 통치하고, 만물은 탄식하고, 슬퍼하며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왕 한사람의 판단잘못으로 온 나라가 전쟁에 져서 조공을 바치고 백성들은 비참한 노예살이 가 되었다면 어떨까요?
세상통치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는데 그 통치권을 마귀가 빼앗아 간 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통치권을 되찾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 첫 사람 아담과 동일한 조건과 자유의지의 인성 속에서 시험부터 받으셨습니다.
마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아담에게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리라와 같은 시험이었습니다.
아담은 실패했으나 예수님은 승리하신 줄 믿습니다.
이 결과가 무엇인가요?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왔듯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사람에
게 생명이 왔습니다.
2) 사망
자유의 반대는 무엇인가요? 소극적으론 부자유이지만 적극적으론 사망입니다.
상태적으론 하나님과 단절입니다.
그 결과 육체의 죽음이 오고 마침내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인 것입니다.
이런 역사위에 인류는 번영했으나 진정한 자유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인생살이가 불행 한 것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고 전쟁, 질투, 망함 등은 사망의 대표 산물입니다.
갈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
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는 하나님의 탄식이 나오고 분노의 동기가 됩니다.
사람창조는 알곡을 바라고 풍년을 기대한 농부된 하나님 마음인데 쭉정이가 되었으니 어떠셨을까요?
사1: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
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 물러갔도다
구약의 역사는 무엇인가요?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메시지요, 또 그들을 싸매시는 사랑의 역사와 메시지입니다.
사람은 종교성을 갖고 종교를 만들었지만 그 방편이 하나님을 진정시키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귀와 마귀의 일을 멸하지 못했기에 근본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3) 복음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예언자를 통해서 계속적인 구원의 예언과 증거를 보이신 하나님은 때가 되어 예수님을
온 인류의 속죄의 희생양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양을 잡으라” “예루살렘으로 올라와라” “십계명을 암송하고 지켜라”가 아닌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 입니다.
조건 없는 은혜의 방편으로 모든 사람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자유는 이 결과입니다.
8,15는 우리의 광복절입니다.
빛을 다신 찾은 해방의 기념입니다.
어디서 해방되었나요? 일제의 식민지에서, 찬탈에서, 억압에서 자유를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 죽음에서의 자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먼저 첫 열매로 살아나셨습니다.
* 율법에서의 자유,,율법은 이스라엘인이 예수님 오시기전까지의 법입니다.
죄를 지적해 주는 법인 동시에 예수님께 인도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인이 아니기에 율법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었기에 죽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율법에서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 죄에서의 자유,, 죄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 세력은 막강하지만 죄가 나를 유혹은 하되 속작할 수 없습니다.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이를 확실히 합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
지 말라
자유를 되찾는 일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자유가 그렇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건 없이 베푸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자유인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받았던 옛 성도들은 믿음으로 시작한 자유생활을 이단의 유혹에 빠져서 율법적인 유대주의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믿음은 무조건인데 비해 율법주의는 상대적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캐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일만 열심히 한 나머지 쉬거나 놀 줄 모릅니다.
쉬는 데는 편히,, 노는 데는 재미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일하는데 소모된 에너지를 충전시키는데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생깁니다.
쉬거나 놀 때도 가만히 있질 못해서 휴대전화라도 검색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합니다.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구원의 자유도 상대적으로 이해합니다.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셨고 우리에겐 그냥 선물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여전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자유를 만끽합니다.
결론) 그러므로 “생각해야” 합니다.
갈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
로냐
무턱대고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유를 주셨으니” 귀한 댓가를 지불한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잊으면 안 됩니다.
또 “비장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의 가치를 알 때 숙연해 지고 지키기 위한 비장함이 옵니다.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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