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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할 자와 쇠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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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03-15 11:51 조회 46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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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은 옥에 갇히기 전에 주님에 대한 자기신념을 고백했습니다.

“그분은 점점 위대해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더 작아져야만 한다.” 이는 원어적 의미입니다.

 

위 고백은 법률에 의한 고백이 아닌 가슴으로 온 고백이기에 의미가 무겁습니다.

법관이나 의사들도 나름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가슴으로 고백해야 삶으로 이어집니다.

 

대구의료진의 한 고백이 이를 증명했습니다.

“불편하지만 빨리 환자들이 완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지만 외국에서 필요하다면 또 자원할 생각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발전하며 감동을 받곤 합니다.

 

1) 성도의 신념

성도의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이면 충분합니다.

오랜 전통과 분명한 신학과 신앙적 바탕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으로 이교와 이단을 감별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신앙고백과 함께 뗄 수 없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앞선 신앙고백이 성도됨을 천명했다면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성도의 삶의 자태를 천명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물론 관계의 모든 갈등이 어디서 오나요?

내가 흥해야 된다는 데서 옵니다.

 

최근 지방도시의 교회에서 장로투표를 했는데 후보자 한사람이 표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후 예배도 안 나왔기에 부목사가 심방을 가고자했으나 담임목사님이 만류했답니다.

그러나 부목사는 심방을 갔고 “내가 심방 오고자 했는데 담임목사님이 반대했다” 며 담임목사의 뜻을 왜곡시켜 말했답니

다.

결국 이 후보자는 담임목사님께 전화해서 2시간이나 원망과 불평을 퍼부었답니다.

담임목사님은 사과하는 등, 이후 담임목사님은 부목사를 “당신은 담임목사 자격이 되니 다른 교회를 찾아보라” 권했고,,

부목사는 또 이 말을 후보자에게 해서 당사자들끼리 서로 탓하는,, 이놈 저놈하면서 싸움판이 벌어졌답니다.

 

문제의 근원은 나입니다.

내가 흥하려고 하다 보니 이처럼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많은 교파와 교단이 있습니다.

동일한 신앙고백 속에서 이처럼 많이 갈라진 것은 신학적 차이가 아니라 내가 살고자했던 자리싸움과 밥그릇 싸움 때문이

었습니다.

세상은 그럴 수 있습니다만 교회와 성도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다”가 주된 찬양이고,

먹던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다 주의 영광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그렇지 못한 것이 불편한 진실입니다.

 

2) 주가 흥할 이유

왜 주님이 점점 흥해야 될까요?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고 나의 주인이고 만물의 통치자시고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

로부터 오신 이는 만물위에 계시나니

성도는 이 분을 섬기는 존재이고 영광을 드러내는 의무자입니다.

그러나 자태에 있어서 자기중심은 저숙이고 이타중심은 성숙입니다,

구체적으로 저숙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반면,

성숙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얼마나 큰 차이인가요?

그러므로 어디든 싸움이 있다면 저숙이고,, 성도 간에 싸운다면 저숙 신앙인 것입니다.

철없는 아이들일수록 자기중심이고 작은 것에 싸우지 않나요?

성도에게도 “존재냐 소유냐”는 언제나 큰 문제이고 긴장관계라지만 존재라는 정체성을 붙들어야지 소유를 붙들고 따르면

싸우다 상처만 남긴 체 다 잃고 맙니다.

 

여기에 절대적인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사실만이 아닌 보여지지 않는 진실도 바라보고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하나님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은 아들의 당연한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과 기독교초기의 성도들과 우리의 신앙선배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았던 것을 명심

해야 합니다.

 

모세가 왜 그 백성들과 함께 능욕 받기를 애굽왕자 생활 보다 더 기뻐하였을까요?

믿음으로 상 주시는 이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도전이고 모험입니다.

하늘과 땅의 많은 것들을 하나님은 이미 말씀으로 약속하셨고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약속도 맹세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라” 가 괜한 권면이 아닙니다.

 

현대의 성도들은 너무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탓에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더 보고 그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경험이 클수록 “열방들아 주를 찬송할지어다.” 하며,

더 나아가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송할지어다.” 하게 됩니다.

 

3) 내가 쇠할 이유

예수님과 나는 상대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주인이시고 나는 종입니다.

그분은 목자이시고 나는 양입니다.

그분은 신랑이시고 나는 신부입니다.

그분은 머리이시고 나는 지체입니다.

불가불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흥해야 나도 흥해질까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하신 최고의 말씀을 기억하나요?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세상에는 많은 법칙이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법칙,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등,

성도는 땅에 살면서 하늘의 시민권자이기에 두 세상의 법칙이 다 해당됩니다.

그 중 믿음의 법칙이 절대적이어야 삽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는 땅과 하늘에 대한 처세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모든 일이 기도와 간구” 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가 받쳐져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새 본성을 주입시켰는데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지는 듯해도 이기고,, 손해 보는 듯해도 남고,, 죽는 듯해도 사는 일체의 비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매였고 율법에 열심이고 철저했지만 가슴은 죽었기에 예수님도 죽이고, 야고보도, 스테반도 죽이고, 사

도바울도 죽이고자 했었습니다.

종교인은 이렇듯 겉불만 뜨겁지 속불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박해 속에서도 주를 만난 성도들은 겉불은 자유 했지만 속불이 뜨거워 주를 따르는 일에 모든 박해도 은혜로

믿었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다가 감동 받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

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철저한 나를 위한 대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이대로 믿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우리는 생각하기를”하여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이 왜곡이 하나님의 반대가 된 것입니다.


결론) 그렇다면 주는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에서는 왜곡이 없을까요?

“우리는 생각하기를”를 지우고 “우리는 믿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을 때 반대로 주님은 날마다 흥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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