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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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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0-12-13 14:20 조회 32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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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은 믿음의 부분이 있고 실천의 부분이 있습니다.

믿음의 부분은 복음서와 로마서가 잘 계시하고 있는데,,

무엇을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 믿음의 결국은 무엇이냐 입니다.

이제는 그 믿음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서신서와 특히 야고보서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1) 믿느냐?

야고보서의 주제는 한 구절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약2:19~20)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인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아느냐”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 마귀의 믿음도 하나님께 떤다는 말이지만 그것 뿐,,선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 하나님은 물론 구세주를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하나님도,, 심판도 믿지도 않기에 두려워 떠는 일이 없습니다.

유감되게 성도도 그처럼 되었습니다.

성도의 범죄가 이를 증명합니다.

 

옛 바리새인들은 표면적이었습니다.

도금한 신앙으로 사람들을 의식한 겉치레였습니다.

그런데 도금조차도 안 된 신앙이 있습니다.

주님조차도 “내가 말세에는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이유로서

하나님을 향해서 떨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정금된 신앙은 어떨까요? 안팎이 동일한 변질하지 않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년말에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일과 믿는 일에 일치를 이루었는가?

내 믿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을뿐더러 그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내 선한 일은 하나님께 뿌리 둔 선한 일인가?

아님 내 기분과 내 의를 세우기 위함인가 하며 성찰해야 합니다.

 

믿음은,, 거듭남을 이루고 성령이 주시는 새 성향으로 되살게 합니다.

성령이 보혜사로 내주하시면서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주를 갈망하며 그 분께 모든 생애의 촛점이 맞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심령의 가난과 애통이 나오고 긍휼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병에는 증세가 있듯이 믿음의 증세는 누구나 언제나 동일하기에 확증이 가능합니다.

그 최고 증세는 주를 위하여 죽기까지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근대에도 또 언제나 그렇게 될 것입니다.

 

2) 선한 일

여기에 선한 일은 자연스런 열매입니다.

불의와 악은 모양이라도 거부하고 선하고 의로운 일에 마음이 갑니다.

선한 일,,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불의와 악에 반대적인 모든 모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치레로 했다면 믿음은 언제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낮과 밤이 다르고 시대와 문화 따라 제각기 다른 윤리를 냅니다.

그래서 코에 걸려 코걸이고 목에 걸면 목걸이가 됩니다.

사람의 사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차별화와 낙태 등이 왜 이제사 문제가 되었을까요?

간단합니다, 문제는 전부터 있었지만 이제야 생각되어서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나 동일하여 선함도 일정합니다.

그 믿음을 주신 이도 성령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도 성령이시기에 동일합니다.

선한 열매가 크냐 작으냐는 믿음의 크기에 따라 달라도 선한 열매라는 믿음의 질은 언제나 확실합니다.

 

훗날 천국에서 보고 싶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거봉이 아니라 오병이어기적의 단초가 된 도시락을 드린 소년,

극심한 궁핍 중에서 엘리야를 섬겼던 사르밧 과부, 옥합을 깬 여인, 예수님말씀에 순종했던 가나잔치집의 종들, 식민지 국

민들을 사랑으로 섬겨서 칭찬 받았던 가버나움의 백부장 등이 궁금합니다.

지금처럼 믿음에 대해서 개명천지가 아니었던 시절에 예수님을 믿고 선한 일에 용력했다는 그 자체가 놀랍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궁금한가요?

이들은 작은 자들이었고 이름도 남기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한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하나님께서 기념비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이들에게 선한 일은 당연사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도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길 축복합니다.

이게 빛의 열매이고 성도의 사명인 줄 믿으십시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

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8~11)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특별히 “주 안에서”를 기억하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닌 주의 힘으로만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통해 비취는 반사경과 건전지를 통해 비취는 반사경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낙심하지 말라

선한 일에 큰 장애가 있다면 무엇일가요? 낙심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셔도 마귀의 궤략이 난무하여 훼방하고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앞둔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마귀는 노골적으로 시험했고,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로 하여금 죽지 않도록 권유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일에 굳세지 못하면 넘어지고 자빠져서 시험에 들고 포기하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며 교훈하시며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데는 낙심은 옵션입니다.

특별히 주변 이들과 환경을 통해서 역사하는데 기도로 여리고성을 돌듯이 승리해야 합니다.

 

며칠 전 의사 장로님으로부터 아침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연인즉 병원 1층에 두 점포가 세를 들었는데 그 점포 앞에 조그만 설치물이 불법이라서 계고장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을 듣지 않는답니다.

철거비의 반을 장로님이 부담한다고 했는데도,, 또 코로나사태로 월세를 3분지 1로 줄여주었는데 그들의 행태에 마음이

불편하다 했습니다.

 

선한 일,,멋진 말이기에 개나 소나 다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일은 거룩한 일이고 주께 속한 일이기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은 받은 자니,,” 믿으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선한 일에 참예하십시오.

 

첫째는 복음적인 일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고 셋째는 의로운 일이어야 합니다.

또한 낙심했더라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이별 두려워 사랑 접을 수 없듯이 구데기 무서워 장 안 담글 수 없는 이치입니다.

구주성탄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선한 일을 생각하시나요?

 

개인적으론 북한과 연변의 농촌교회목회자들과 북한 영아원에 석탄 줄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선한 일에 “낙심”도 오지만 적극적으로 하면 길도 열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여러분에게 한권의 책을 나눌 것입니다.

나눔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가 간증하고 있기에 귀감이 됩니다.

그 책 서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적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

앉은뱅이 믿음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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