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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솜과 엘리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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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9-01-06 14:03 조회 50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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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파란만장의 삶은 두 아들의 이름이 웅변해 줍니다.

그러나 모세만이 아닌 모두의 삶이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1) 큰 아들 게르솜

게르솜은 먼저 난 아들입니다.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애굽에서의 모든 학문과 학술을 배웠던 모세가 정반대의 삶에 떨어졌습니다.

왕의 후계자가 아니라 장인의 양을 치며 붙어먹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결핍이요, 어둠이요, 곤란이요, 곤고라 합니다.

실제 삶의 많은 불안과 두려움은 이런 생활로 가지 않기를 염려해서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끊임없이 생기고 있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괴로운 시절입니다.

 

이럴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원망하거나 복수심을 태우거나 자포자기하거나 등,

세상방법을 구사하는데 뇌 속에 다른 내용이 없어서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살고자하는 방법도 세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러는 인생을 의지하고 혹은 산으로 들어가고,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교육 때문인데 믿음의 어머니로 부터 강보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들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어땠나요?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

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모세도 믿음으로 광야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히11:24~25)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관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렇다고 해서 광야에서의 이방인적 삶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광야는 여전히 황무했고 이방인의 신분도 배타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과 고백이 달라졌습니다.

 

2) 둘째아들 엘리에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나를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뭐가 달라졌나요?

“나를 도우사” “나를 구원하셨다 함이라”

누가 개입하였나요? 하나님, 어떤 하나님인가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나요?

양 치던 모세를 찾아오셔서 민족구원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결과 모세도 달라졌고 그의 민족도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변화는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으신데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광야의 이방인이

되기도 하고 돕는 하나님이 되셔서 바로의 칼에서조차 구원을 얻기도 합니다.

 

이 설교를 묵상하다가 창세기가 생각났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빛이 있었는데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했습니다.

왜 아침이 되고 혹은 낮이 되고 저녁이 되었더라 하지 않았을까요?

첫째 날 만이 아닌 모든 창조 날들을 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유대식 표현이다? 하나님만의 표현이다? 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 반영하면

빛은 여전해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상은 물론 사람도 저녁이고 어둠일 것입니다.

하나님없는 삶이 광야일 수밖에 없는 노릇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과 모든 사람들의 결핍은 빛을 잃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출발해서 머물고 있습니다.

이 빛으로, 참 빛으로 오시신분이 주님이시고,

세상과 사람들은 결핍에서만이 빛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를 복음성가에서도 발견했습니다.

“실로암” 아시나요?

부대교회가 실로암이기에 이 성가를 예배 전에는 꼭 부르도록 최근 지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사를 보면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라고 합니다.

왜 하필 길 떠나는데 어두운 밤에 떠나나요? 새벽을 찾아 빛을 찾아 떠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혼돈하고 가난하면 사람들은 생존본능으로 별별수단을 다 찾다가 결국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탈북민들이 33000명인 데 대다수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교육을 받은 덕이 아니라 탈북 중에 간절했고 기적들을 경험해

서입니다.

 

교회사를 보거나 세계사를 보십시오.

언제 부흥기가 왔던가요? 힘들 때였고 어두운 때였습니다.

기적으로 폐병 낫고 공부한 목사님들이 많던 시대와 좋은 형편에서 공부한 목사들이 많은 시대와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시대는 간절함이 없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먹고 살만하니 온갖 관심사에 팥 놔라 콩 놔라 하고 있습니다.

동네 빵집에서 알바 하는 여성청년에게 “공부해요?” 했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뭐든 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히스테리 부려요,, 호호” 그러면서 자기 입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 여성의 말이 맞습니다.

남의 일에 신경 쓰는 시대, 사랑이 넘쳐서가 아니라 힘은 넘치는데 쓸데가 없어서입니다.

이런 때는 태양이 보이질 않아요.

빛을 찾아 새벽을 찾아 떠나질 않는 게 확실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달라야 합니다.

시대와는 무관하게 이미 빛 안에서 머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보면 빛의 열매를 맺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가요? 물론 개인의 차이겠지만 빛의 대한 예우, 곧 믿음의 차이입니다.

 

 

짧지만 한 많은 이 세상에서 광야에서의 이방인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도다,, 살 것인가?

저녁으로 살 것인가? 아님 아침이 되니,, 살 것인가? 결국 하나님의 개입이고 만남인데,

내 아버지의 하나님인가? 나의 하나님인가의 확실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게르솜만 키우면 살겠나요? 아님 엘리에셀도 낳겠나요? 밤으로 살겠나요? 낮으로 살겠나요?

새해에는 엘리에셀 이던지 “아침이 되었더라.” 하시길 축복합니다.

욥에게 향한 엘리바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욥에게는 합당치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잠언입니다.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22: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새해에는 희망이 많고 덕담도 많습니다.

이 희망과 덕담 속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잊지 마시고 열심과 헌신을 분별하십시오.

하나님은 열심자 보다 헌신자를 원하십니다.

그 차이는 열심은 자기중심이기에 중도 포기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헌신자는 주님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컨대 나에 대한 전권위임을 위임장을 작성해서 날자와 이름과 서명을 해서 드리는 것이라면

열심은 이게 없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는 구주 예수 안에서 이미 복 많았습니다.

“복 많으세요” 보다는 “복을 누리세요.” 가 맞습니다.

주신 복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는 섭리나 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할 여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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