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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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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9-01-20 13:52 조회 54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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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선비 박지원을 보면 그의 탐구와 기록정신은 대단했습니다.

흔들거리는 말안장에서도 붓을 꺼내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청나라황제생신 방문기록기인 열하일기였습니다.

여기 그보다 더 앞선 시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누구인줄은 알 수 있고 그 경건한 열정은 귀감이 됩니다.

 

1) 큰 권세자

그는 당대의 제국인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관리였으니 큰 권세자가 맞습니다.

이 양반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병거를 타고 돌아가면서 이사야서를 읽었습니다.

오늘의 리무진같은 차와 간편한 성경책이 아니고 신작로는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아주 힘든 여정 길에서 흔들거리는 마차를 타고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은 것입니다.

이 자체가 대단한 것입니다.

 

누가 이 모습을 보았나요? 광야인데,

구름도 보고 새도 보았겠지만 사람은 아무도 못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셨고 그를 위해 성경해석자로 빌립집사를 급히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했던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한 후 그가 믿자 그의 간청으로 세례를 베풀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가 누구일까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이고 간절히 부르짖는 자입니다.

 

큰 관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였다면 빌립은 간절히 부르짖는 자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런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경건하여 항상 구제하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기도하던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

당시의 로마군인은 유대인의 착취자였던 것에 비해 그는 유대인들을 위했던 것입니다.

또 박해했던 사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못 먹고 눈을 못 뜨자 하나님은 경건한 아나니아를 보내셨서 그의 기도를 통해 눈 뜨

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베드로가 이를 증언했습니다.

행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

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에디오피아 인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흑인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기피합니다.

그러나 국고 맡은 큰 관리는 사람들이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외모에 상관없으셨습니다.

기피하지도 않으셨지만 큰 권세자였기에 찾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온 믿음,

또 돌아가는 마차에서도 성경을 읽은 그 경건으로 그를 찾으셨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여기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

달았도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면 나를 찾으시고 나를 받으시는 줄 깨닫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2) 깨닫는 신앙

신앙은 자꾸 깨달아야 합니다.

노인들은 편찮으면서 늙고 아이들은 아프면서 자라지만 신앙은 깨달아야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여러분은 최근 무엇을 깨달았나요?

생각과 눈의 밝음과 마음이 넓어지는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저절로 오질 않습니다.

골방에 있는 사람은 신념화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광장에 있는 사람은 개방화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골방에서 기도했다면 광장에서 실천되어야 깨닫게 되어 산증인이 됩니다.

본문의 큰 권세자도 예루살렘에서 예배했으나 흔들거리는 광야길 마차에서 그 경건을 이어가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빌립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만 했던 골방의 그였지만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광야에서 내시를 만났고 또 홀연히 인도하심을 받았으니 깨달은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행9: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

하니라

이런 깨달음, 증험된 것입니다.

이들의 말과 삶은 증인이기에 설득력이 있지만 변호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말은 청산유수라도 증거나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기에 결정적일수가 없습니다.

연예인대상을 받은 수상 연예인들의 인사말이 구설에 올랐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했는데 그들에게는 산 증언이었어도 듣는 자들에게는 불편했나 봅니다.

그러나 증인의 증언이기에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변호인들은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가 있습니다.

 

현대는 이런 증언이 너무 부족합니다.

신앙이 관념화 되고 화석화된 이유입니다.

너무 신비화되는 것도 문제지만 신비가 없는 이성화도 문제입니다.

이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성경이고 보혜사 성령입니다.

 

3) 성경읽기

성경읽기는 신앙의 젖 빨기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태어나자마자 영양공급이 들어가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식물의 잎은 하늘로 뻗치고 뿌리는 물을 찾습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입을 벌리고 어미들은 먹이를 공급합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말씀 앞에서의 반응이 그 신앙을 증명합니다.

그가 거듭났으면 신령한 젖을 찾게 됩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벌써 성도였기에 예배목적으로 예루살렘에 온 것이고 그 사모함으로서 가는 길에도 성경을 읽었던

것이며 그 증표로 세례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성경을 소유한 것과 읽는 것과는 큰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번역본이냐를 중요시 여기는데 진짜 중요한 것은 삶의 번역본입니다.

이는 읽는 정도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성경이 등불이고 생명의 떡입니다.

 

북한에 억류되었던, 지금은 자유된 외국국적의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이들의 공통된 점은 중노동도 어려웠지만 성경을 못 읽는 생활이었답니다.

한분은 사정을 했더니 성경을 넣어주어 잘 읽었고,

또 다른 분은 암송구절로 대신했고 다른 분은 아주 어려웠답니다.

 

우리에게 우리글로 번역된 성경이 있는 일은 큰 은혜입니다.

이런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눈과 자유와 믿음은 여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성도 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유는 자라지 않는 믿음과 영혼의 병듦으로 봐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은 내가 성경을 판단하지만 주의 날에는 이 말씀이 날을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실제이고 그 첫 현상은 말씀이 가까이하는 삶입니다.

롬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

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말씀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나의 겨자씨 같은 믿음은 장부의 믿음으로 성장되고 영혼은 건강하게 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커스에서 빠지지 않는 묘기는 동물묘기입니다.

곰이나 원숭이가 재주를 넘는 일은 고전이고 호랑이나 사자가 불붙는 굴렁쇠를 통과하곤 합니다.

이게 쉽지 않는 일이기에 묘기가 됩니다.

왜 그렇까요?

이들은 우선 맹수이고 또 긴 털 동물은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보상이나 훈련 때문 같지만 그게 아니랍니다.

맹수이기에 두려운 나머지 조련사를 공격할 수 있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조련사에 대한 무한 신뢰랍니다.

불붙지 않는다 하는 신뢰감이 고된 훈련을 이기고 불에 대한 두려움을 넘는 거랍니다.

우리는 서커스의 맹수 보다 못한 믿음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 말씀도 살아 있어 운동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경험해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이 찾아주시는 성도가 되기를 사모합시다.

진짜 믿음이고 경건이며 신앙입니다.

성경읽기는 그 시작이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일이 두 번째이고 세 번째는 보내심을 받는 일까지 있기를 사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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