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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주여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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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9-04-21 14:34 조회 42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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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을 사는 모양을 보니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주의 고난에 동참한다며 새벽기도회와 금식을 통해서 절제된 삶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새벽기도회와 금식은 경건의 모양이 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은 경건의 능력이 됩니다.

 

1) 기독교 신앙

기독교와 천주교의 차이를 아시나요? 많이 있습니다만 십자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빈 십자가입니다.

고난당하셨지만 부활승천하시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재림하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저들은 고난 받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십자가에도 처절한 예수그리스도상이 있습니다.

이는 윤리로도 나타나 기독교는 환희 소망 영광으로 신앙화를 이룬다면,

저들은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 구원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실제 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이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면 할수록 정의와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문하신 거룩입니다.

 

최근 한 일을 건의했었습니다.

용사들의 간식비를 줄여서라도 강원도 산불피해민을 위한 군 교회들도 성금을 내면 좋겠다고,

 

우리는 자칫 주일에 예배당 안에서 “주여 주여” 만 하기 쉽습니다.

이 신앙은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교회중심이라는 갇힌 공간의 신앙일수록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의 뜻대로 하는 신앙은 믿음의 순종, 곧 생활실천이 될 줄 믿습니다.

 

실천은 내가 쇠하여지는 일이고 내가 손해 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망하는 일 같지만 결국 남도 나도 흥하는 일이고 나를 부정하고 주를 따르는 주와 참 동행하는 일이 됩

니다.

그렇다면 주여주여만 하는 신앙은 어떨까요? 그 반대적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비행기나 자동차가 빠른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방향이듯이 주여주여 하는 열심보다는 방향이 온전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많은 지식을 배워도 자신만을 위한다면 자칫 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벌어서 남 준다.” “배워서 남 준다.” 할 때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 되세요.” 하면 “아멘” 하면서도,

“그 돈을 이웃을 위해서 쓰세요.” 할 때 조용하다면 그것은 사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때 나타난 것 아닌가요?

한 소년의 도시락이 “남 준다” 는 뜻에서 주의 손에 들리워졌을 때 축복할 수 있었고 기적이 되고 먹고 남은 12광주리가

있었습니다.

 

2) 열매

친구목사님께 들은 실화입니다.

목사님이 전도사시절 얘기입니다.

철원의 모 교회가 예배당건축자금으로 어려워서 회의를 하는데 여 집사님이 주택복권구입을 말하더랍니다.

찬박 논란 속에서 장로님이 허락해서 결국 그 여 집사님이 복권을 샀는데 200만원 1등에 당첨 됐답니다,

집사님이 주일에 그 돈을 찾아갖고 왔지만 교회가 그 집사님께 보관을 시켰는데 그 후 집사님네가 도망갔답니다.

그리고 수년 후 여 집사님이 장로님께 전화를 해서 남편이 빚 때문에 우선 사용한 후 되갚자고 했다며 꼭 갚겠다는 약속을

했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전화가 또 왔는데 남편이 죽었다면서,,

이때 주변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했답니다.

이런 일을 불신자들은 우연이라 해도 성도들에게는 필연인 것입니다.

마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는 고난의 주만 믿지 않고 우리는 부활절의 주만 찬양하지 않습니다.

모든 날 동안 모든 과정속의 주를 믿고 찬양하며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함은 무엇인가요?

죄에서 날마다 죽고 의에서 날마다 사는 일입니다.

또 고난만 당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하셨기에 실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자에게 위로가 되고 기뻐하는 자와는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율법과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만 여기는 신앙이 아닙니다.

주의 날만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주를 믿는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종교적이고 지식적이고 관념적인 신앙을 삼가야 합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성전을 향해서 이 성전을 헐라 하신 것이 대표적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제단위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산제물이 되어 맛내는 소금으로 녹아지고 빛을 발해야 합니다.

주가 해라면 나는 달이고 주가 신랑이니 나는 신부입니다.

달은 스스로 발광체가 아닙니다.

해의 반사경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받지만 신랑을 위합니다.

신부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입니다.

다르게는 주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지체가 됨으로써 웅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여 주여”만 할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주의 할 바를 해야 합니다.

개도 눈치가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여기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서 “산아, 옮기어라”할 것이 아니라 “옮겨지지 않으면 내가 간다.” 해야 합니다.

 

3)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을 아나요? 변하지 않고 간단명료한 아버지의 뜻은 첫째 아들을 믿는 일이요,

둘째 그 아들을 기쁘게 섬기는 일입니다.

권능이나 선지자 노릇만이 아니라 작은 예수로 사는 일입니다.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셋째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할수록 경배하고 전도하는 일입니다.

내가 친절해서 좋은 이미지의 성도인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라도 주께 인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국에서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나 같은 성도가 모인 교회가 존재하는 일입니다.

선교사가 파송되는 이유이고 복음방송과 신학 대학이 세워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어느 덧 사람들의 일이 되고 사람들의 입을 위한 방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탓에 사람은 살지만 하나님의 뜻은 쇠하여졌습니다.

주님의 탄식이 있을 법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연길의 목사가 오셔서 그쪽 소식을 전했는데 연길의 큰 교회가 형제간에 싸움이 났답니다.

왜 싸울까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일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이 내 편이길 갈망합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이 내 문제와 소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서 떠나 자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나를 바꾸지 않으면 절기도 종교도 십자가도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세상부터가 아니라 주를 믿는 나부터인 것입니다.

성경적 신앙이 거창하고 복잡한 것 같아도 아주 쉽습니다.

복잡하고 거창한 것은 마귀의 궤계로써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가미된 것입니다.

 

결론) 사람을 알려면 그의 열매를 보십시오.

자신을 보려면 역시 열매를 보시기 바랍니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만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유감입니다.

말 보다는 실천이어야 합니다.

삭개오의 모습이 과장이 아닙니다.

눅19:8) ~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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