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착한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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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선한 싸움꾼입니다.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확실성을 위해 세상에 살면서 영적전투를 하는 용사들입니다.
언제나 병기삼아야 할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믿음과 착한 양심입니다.
딤전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1) 상황
믿음과 선한 양심이 절대적인데 비해 그렇지 못한 역사와 비굴한 인물들은 넘쳤습니다.
가롯유다는 둘 다, 베드로는 믿음을 파선했던 인물이었고
딤전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그리고 현대에도 많습니다.
이런 결과 선한 싸움이 몰리고 마침내 하나님나라의 위기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싸움에는 언제나 진리가 앞서야 합니다.
이는 지는 듯해도 이기는 하나님의 비법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아이들이나 어른들을 오게 하기위해 상품권이나 생활품으로 앞세운다면 어떨까요?
전도라지만, 당장의 모이는 효과는 있을지언정 복음의 신앙인은 만들 수 없습니다.
또 예배는 짧고, 설교는 더 짧게, 대신 다른 재미있는 오락으로 대체한다면 어떨까요?
교회의 존재성 마져 허물게 됩니다.
모태신앙이라면서 고등학생이 다윗과 골리앗을 모르면 어떨까요?
은퇴하실 목사님이 교회학교를 둘러보았더니 초등부아이들이 흙을 쌓고 있었답니다.
목사님이 “이 여리고성은 누가 무너트렸지?”묻자,
아이들은 “내가 안 그랬어요?” 하면서 도망가고 심지어는 울기도 하더랍니다.
믿음에서 파선한 교회교육의 모습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성장해서 착한 양심을 가질리 만무이고 선한싸움에서 이기는 세대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등장한 후메네오를 보십시오.
딤후2:17) 그들의 말은 악성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미국은 기독교 입국가입니다.
그들의 각계지도자들은 근본신앙이나 보수신앙인들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좌익사상을 추종하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유신론신앙은 유물론주의를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서는 목사와 장로들에게서도 이 유물론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들이 많으니
잘못된 것입니다.
2) 믿음
믿음과 선한 양심에서 무엇이 먼저 강조되었나요?
믿음인데,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이 믿음의 영성에서 착한 양심이라는 도덕이 맺히고,
착한 행실이라는 윤리가 나옴을 명심해야 합니다.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덕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경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교육해야 하고 그 경건에 이르는 연습해야 합니다.
믿음만이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좋은 믿음은 좋은 검이고 큰 믿음은 큰 검입니다.
경험한 바로는 방배동 시절 고등부에게 요한복음을 강론했었습니다.
훗날 그 출신들이 그때의 요한복음 강론을 고맙다 했습니다.
여의도의 경우 수련회에서는 십자가 도를 많이 강론했었습니다.
당시에 참가자들은 힘들었다지만 그러나 그들 역시 지금도 신앙 안에 있습니다.
군 교회에서 지난 13주간의 행한 설교 제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제사, 레위기 총론(5대 제사 의미), 불량한 제사, 상한 심령, 믿음으로,
대제사장 예수그리도,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율법은, 믿음으로(2), 믿음만이, 믿음으로(3),
누구든지, 첫 열매 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감사의 예물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자녀교육법이 좋다고 하는데 성경을 가르치는 조기교육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는 유교식, 학교에서는 일본식, 교회에서는 미국식,
이도저도 아닌 교육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이 유대인의 교육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유대교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믿음을 디모데에게 또 말씀합니다.
디모데가 부족하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강조입니다.
디모데가 누구인가요? 믿음이 아들이고 제자 아닌가요?
그래도 또 전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교회가 믿음의 교회였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다시 전한 것이 로마서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 함이었고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믿음은 가슴에서 시작되어 머리에서 머물고 마침내 온 몸으로 퍼져야 합니다.
그것이 산 믿음의 증거가 됩니다.
신기하게 믿음은 설교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반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에서부터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척도가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믿음에 있으면 나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그냥 감사하고 좋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3) 착한 양심
김장환목사님의 인터뷰를 보니 두 가지가 두드러졌었습니다.
첫째는 모교인 밥죤스에서 제명을 당하는 일임에도 빌리그레험 목사의 통역을 했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제명도 감수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정직과 책임감은 기본이었고 열심과 부지런함이 더했었습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기적을 구하는 신앙 보다는 이런 믿음과 선한 양심이 앞서야 합니다.
개인이나 집안이나 사업이나 정권이나 국가도 아차 하면 망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괜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반대는 “하늘은 스스로 망하는 자를 망하게 하신다.”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입니다.
경제적으론 IMF나 무디스가 경고하고 우려한 상태이고, 국민연금은 마이너스 시대,
정치는 자리다툼, 정권은 실패한 사회주의민주주의로 가고자 하고, 부정부패와 도덕적 해이는 심각하고, 무엇보다도 교회
들의 불량이 많습니다.
특히 교회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의인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의인된 교회, 누구 인가요? 결국 누구인가요?
믿음의 반석은 확실한가요? 착한 양심을 발휘하시나요?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떤가요?
최근 동네에서 본, 대비된 두 모습입니다.
하나님의교회가 전도를 하는데 교회 앞에 부스를 세우고,
자신들의 수재민봉사 사역영상을 틀어놓고 차를 끓여 행인들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 옆의 장로교회는 이런 모습이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70세는 족히 넘긴 할머니 한 분이 1회용 휴지
를 들고 역시 교회당 앞에서 전도했습니다.
이단보다 낫다면 생활신앙을 보여야 합니다.
진급이나 수능을 앞두고 기도만 하는 믿음 보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와 평화와 정의와
인자와 겸손이 충만해야 합니다.
여의도에는 3교회가 블럭 안에 있었습니다.
그 옆에 미국인 교회도 있었는데 우리들이 때마다 모였던 일에 비하면 이들은 날마다 불 꺼져 있었습니다.
얼마 후 3교회는 더하고 더하여 번듯한 예배당을 짓기도 하고 또 이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3교회 모두가 피터지게 싸우고 분열되어 지금도 내홍을 겪고 있는 반면 미국인 교회는
그 자리에서 여전했습니다.
무엇이 좋은 신앙일까요? 어디가 성경적일까요?
결론)우리는 태생적으로 믿음이든 양심이든 허약하고 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허약함을 합리화 시키지 말고 나 하나의 영향력을 믿음으로부터 발휘해야 합니다.
비만과 술 취함이 전염되듯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내 작은 믿음과 착한 양심의 행동들이 사실은 주변에 그리고 우리 사
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외쳤지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이고 향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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