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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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가 국가우선주의나 국경은 돈독해져도 사회적 통념은 되레 모호해지는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신앙적으로 모호한 점이 증가하고 있어 반기독교적인 제국에 맞섰던 초대교회성도들의 신앙을 상기해 보았습니다.
1) 모호한 통념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내가 참 좋게 읽고서는 주변에 나누어주었던 책이 있었는데 마침 그 출판사장목사가 계셨기에 그 책이 나오게 된 과정을
잠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좌파의 기원부터 그리고 그들의 목적까지 소개한 나머지,, 현 정권에 부담을 갖은 출판사들이 출판을 기피했었기에 자신이
출판하게 되었답니다.
나는 그런 책들을 잘 홍보해서 보급시키면 좋겠다했는데,,
사장은 목사님들이 싫어할 수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우리가 선전선동은커녕 진리사수와 보급도 못하니 그 비굴함으로 이미 진 영적전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또 다른 목사님들의 모임에서는 동성애자가 교회에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와 이혼자의 제직임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
문해 보았습니다.
많은 담론이 있었지만,, 결론은 없이 대체로 “그 이유를 살펴서 결정한다.” 였습니다.
결국 교회등록도 면접이 가부를 결정짓게 된 것인데 이 역시 모호한 것입니다.
신앙도 보수와 진보가 있습니다.
보수는 이 두 경우 “악”으로 보지만 진보는 “약자”로 봅니다.
그리고 여기에 맞는 성경구절을 각기 꿰맞추는데,,이럼은 논리입니다.
“교회가 열려야지 닫혀서야 되겠는가? 차별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또 “이런 자를 내어 쫒지는 못해도 받아서는 곤란하다”며 상이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주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실까요?
또 다른 일은 “설교” 입니다.
설교는 좋은 말씀이나 설교자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자는 그 대언자입니다.
그래서 성의를 입기도 하고 단에서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군 교회 연합기도회에서는 이 말씀을 봉독할 때면 다 일어섭니다.
그런데 목사가 한 포럼에서 강연자가 되어 이런 설교를 “전도사가 노가리를 풀고 있기에,,” 했다면 어떨까요?
전도사비하나 설교비하 보다는 설교학에 문제가 있는 목사 같았습니다.
아니 그의 신학이나 신앙 전체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가 큰 교회의 담임이며 유명자인 것은 별개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받아드리나요?
하나님 말씀,,그 냥 좋은 책,,혹은 이스라엘의 역사책으로,,또는 그냥 두꺼운 책으로 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설교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결정되어,
좋은 말씀, 목사님 말씀,, 예배 순에서 빠지지 않는 말씀 정도로 이해하며 믿어,,
설교는 자연히 짧아야 좋고,,의 말씀으로 전락한 듯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대체하는 다른 일들이 많아졌고 설교도 개나 소나 할 수 있다는 말이 돕니다.
설교는 논증되어야 합니다.
내용이 있고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짧아서 좋은 것이 있지만,, 나쁜 것이 있다면 설교입니다.
그렇다고 길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옥수수도 삶아지는 시간이 있고 세탁기도 도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내용이 있는 설교가,,논증되어야 할 설교가,,그런데 성도들이 짧은 것을 선호한다면,,
또 설교자역시 그것을 멋스럽게 이해한다면 어떨까요?
시대가 그렇고 문화가 그렇다면 유감입니다.
2) 변하는 문화
모든 문화는 사람이 만들어 갑니다.
모임에 참석한 목사님이 필리핀에서 동성애자주례를 했답니다.
그들의 문화였기에 했었지만 한국에서는 문화가 아니기에 안 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변화된 미래에는 할 수도 있다는 의미인데,, 상황신앙입니다.
우리에게는 변화하는 것이 많습니다.
100 년 전에는 남녀가 유별해서 예배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오락과 돈사용을 금한 적이 있었고 드럼도,,복음성가도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변하고 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 펄쩍 뛰는 동성애자도 이혼이나 혼전임신처럼 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태도는,, 신앙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방원이 불렀던 “하여가”를 아시나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생략)
정몽주가 불렀던 “단심가”도 아시나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문화나 대세를 따라 가는 것이 신앙일까요? 유행일까요?
아님 손해를 보더라도,, 거부하면서까지 되레 빛을 비취는 것이 신앙일까요?
주님은 성도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하셨습니다.
소금은 신분이고 빛은 역할입니다.
본문은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했습니다.
범사에 좋은 것을 모르나요? 악이 어떤 모양으로 변장하든 분별하시나요?
유다서에는 꼭 명심할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유7절)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
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3) 금단의 열매
하나님이 아담하와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 최초의 계명은 인류에게 주신 것입니다.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자유를 주셨고 따라서 금령도 내리셨습니다.
이들은 자유를 선택했고 잘못된 자율로 금령도 어겼습니다.
이후 우리는 자유와 자율로 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죄악의 문화도 만들고 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문제는 선악을 뒤바꾸는 일도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주권이고 통치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와 주권을 자유와 자율로 침해하면서 하나님질서를 파괴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구별과 질서가 점점 모호해 지고 어떤 것은 뒤바뀌어 놓았습니다.
성도로서의 구별도 없습니다.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입
니다.
여기서 만물가운데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교회도 모호해서 쇠퇴해지고,,
설교가 웃습게 되고 등,,
사람들은 행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 행복은 생긴대로,, 속성대로 살 때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행복이어야 가치 있고 의미 있습니다.
자유와 자율이라는 미명에서 거룩을 놓치면 안 됩니다.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되고 결국은 망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심은 이 모든 어긋남을 본래대로 회복시키셨고 그 삶을 이루도록 하심입니다.
여기서 새 본성이 주어졌고 그 본성을 갖고 살 때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골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
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
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결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
아브라함이 여종이었던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버렸던 조치이고 우리가 날마다 주와 함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저절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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