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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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일종의 결핍으로,,그 사람을 움츠려들게 하곤 합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군종병이 있었는데 전역 후 이름부터 개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신앙생활하면서 지어준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답니다.
여하한 이 용사에게는 야곱이란 이름이 부담되었던 것입니다.
1) 삭개오
삭개오도 콤플렉스의 사람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남자로써 키가 작았고,,당시에 동족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세리는 로마를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했고 그 일부는 자신이 일부는 로마에 대납했었기에 존경 받지 못한 직업이었
습니다.
이러한 그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뵙고자 나무위로 오르는 열심을 발휘하였습니다.
결핍이,, 누구에게는 우울과 포기를 주어도,
또 다른 누구에게는 노력을 이루기도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알았어도 예수님은 삭개오를 모른 상태였을 텐데,,
삭개오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
겠다 하시니
이런 만남은 언제나 놀라운 만남입니다.
나는 대통령을 압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나를 모릅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일산에 온다고 해서 나갔다가 대통령이 내게로 와서 악수를 청하면서 내 이름을 부른다면 어떨까요?
주변의 반응은 어떨까요?
눅19:6~7)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하
더라
삭개오와 같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항상 있는 일은 아니기에,, 신비한 일입니다.
김춘수의 “꽃” 이라는 순수시를 아시나요?
전문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2) 만남
이렇듯 만남은 서로간의 목적이 부딪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일수도 있고, 거래일수도 있고, 신앙일수도 있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찾았던 일은 설령 결핍으로 인한 호기심이었다 하더라도 주님이 그를 불러주심으로,, 이 만남은 구원이
되었고 후대의 롤모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 온 거리보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주신 거리가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눅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거리만 아니라 삭개오가 예수님께 보인 반응 보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보이신 반응이 더 컸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은 앞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
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만난 것도,,
내가 성경을 공부하다가, 혹은 어떤 결핍을 갖고 주님을 찾았다 할 수 있지만,
실제는 예수님이 먼저 사랑하셨고,, 불러주셨고, 찾아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늙고 가난한 부모를 부끄러워해도 커서는 그런 부모의 사랑과 희생으로 밥을 먹고 자랐음을 아는 이치와
같습니다.
보십시오,,
삭개오는 예수님을 향해 어떤 소리를 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당당히 “삭개오야” 하며 불러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부끄러움이 없잖습니까?
주님과 나와의 만남은 이렇게 되어진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찬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 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 났네
주 내 맘에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3)회개의 열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불러주심으로 이 만남은 견고히 성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삭개오의 행동과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급히 내려 왔고” 그러면서 스스로 책임 있는 말을 했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
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믿음은 회개를 동반하고 행동은 곧 믿음이 됩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까?
또 누구를 믿으면 신뢰하고 따르게 되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깊은 회개를 이루는데,, 행위로 증명했습니다.
회개의 열매이고 곧 구원에 이르는 열매가 된 것입니다.
사람의 기질은 차이가 있어서 누구는 급진적으로 이렇듯 이루고,
누구는 점진적으로 이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행위가 따르는 것입니다.
이때 구원을 주시는 주님은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자기 안의 증거가 있게 됩니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
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주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의 조건을 먼저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종교일 뿐 참복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는 더더욱 아닙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셨으니 믿음으로 거저 받으라” 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복음에 믿는다면,,감사한다면,, 당연의 행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삭개오는 이 행위로 가난하게 되었겠구나..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절반을 기부하고,,
나머지 절반에서 과거의 부정으로 모은 재물의 4배나 되갚는다면,,어땠을까요?
언제나 어려운 결단이라지만 그러나 그렇게 했을 줄 믿습니다.
빛이 들어왔더니 즉시 어둠이 떠난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생각했으니 인애가 들어 온 것이고, 정직이라는 의라 들어 왔으니,,
거듭남입니다.
흔히 좁은 문, 좁은 길을 말하곤 합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로도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좁은 문도 들어 갈 수 있는 문이고 좁은 길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협착한 것이 문제지만,, 작은 자나 낮은 자에게는 문제되질 않는 문이고 길입니다.
베트남 호치민시 옆에는 구찌터널이 있습니다.
옛 베트콩들의 요새였는데,, 그 문과 길이 아주 좁았습니다.
덩치가 큰 미군들에게는 걸리는 문이요, 길이었다지만 체구가 작은 그들에게는 살만한 문이고 길이였던 것입니다.
결론) 세상과 세상의 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 따르는 일은,
주의 제자가 되는 일은 언제나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진정일 때는 좁은 문, 좁은 길은, 언제나 신나는 산 길 입니다.
주님을 기다리셨고,, 마침내 찾아오셨던 그 주님을 삭개오처럼 만나셨나요?
그 주님을 만난 후 넓은 문과 넓은 길이 없었다고 불평하고 불만하셨다면,,
회개와 믿음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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